공부보다는 달리는 것이 좋았던 남자, 그 열정 하나로 원하는 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본가인 대전에서 학교인 청주까지 맨몸으로 뛰어갈 정도로 빛나는 청춘을 보낸 한 명의 청년. 이내 체육 선생님이 되기로 결정한 그해. 머지않아 88 올림픽을 앞둔 그해, 그가 병원에서 깨어났다.
한순간이었던 사고, 힘겹게 깨어난 그날 남자는 삶의 첫 번째 기적을 마주했다. 동시에 또 하나의 결심도 하게 된다. 한쪽 다리로 살기를 인정하는 것, 그 결심을 지켜내는 것. 그것이 스물여덟 살의 청년이 스스로와 한 약속이었다. 오히려 아무렇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미련을 내려놓으니 비워진 공간에 용기가 들어섰다. 하나가 사라졌다면, 남은 하나로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마음뿐. 다시 한번 열정 하나로 비행기를 타고 무작정 타국의 땅을 밟았다. 익숙하지 않았던 의족과 함께 한 걸음, 두 걸음. 그렇게 한 회사에 들어가 사람들 앞에 설 때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마침내 살아가는 것이 전부였던 그의 삶에 가족이라는 새로운 꿈이 들어서기까지, 그는 최선을 다했다.
36년이 지난 현재, 청년은 예순이 훌쩍 넘은 아버지가 되었다. 이제 빠르게 뛰어가는 것보다 천천히 올라가는 산이 더 좋은 나이가 되었다. 그런 아빠에게 산에 가자고 하면 바로 답장이 올 정도로.
“아빠, 내일 산에 갈까?”
“10시”
“김밥 싸갈까?”
“엉”
가방에 지팡이, 물까지 한 보따리인데도 아빠의 삼각대는 빠질 수 없었다. 가파른 경지에 가기 전까지 그날의 풍경을 담고, 기록하는 것을 잊지 않는 남자였으니. 특히 누군가와 함께 간 날은 1일 영화감독이 되었다. 언젠가는 한참 뒤에서 나만 찍는 아빠를 보며 왜 그렇게 사진이 좋은지 물어본 적이 있다.
“두 다리 있을 때 사진이 있으면 좋았을 텐데, 할아버지는 안 찍어줬어. 보고 싶은데 남아있는 게 없어.”
그 아쉬움이 딸이 태어나 말하고 걷고 뛰는 모든 순간을 담아낸 동기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먼저 가, 먼저. 같이 가면 느려.”
발걸음을 맞춰 걸을 때마다 아빠가 말한다.
“싫어, 같이 갈 거야.”
한참의 실랑이 끝에 돌아오는 내 대답을 듣고서는 마지못해 웃는다. 나는 그 상황이 좋았는지도 모른다.
“아이고 나이가 몇인데 아빠 껌딱지야?”
라며 뒤따라오는 그 말이 기뻤는지도 모른다.
아빠는 늘 봐왔던 나무와 풀, 강을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아름답다는 말을 반복하기도 했다. 나에게 아빠도 자연과 같은 존재였던 것을. 그만큼 다른 몸을 가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기보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로 다가왔다는 것을 알까. 그 의미를 자세히 들여다본 건, 강했던 나의 아버지도 연약한 모습이 있음을 알고 난 이후라는 걸 알까.
“미치자. 꿈에 미치자. 딸아, 원하는 것이 있으면 미쳐라, 그러면 할 수 있어.”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들은 ‘미치자’라는 말. 때로 손사래를 치며 알았다는 소리를 하면서도, 꿈이라는 가치를 버리지 않은 당신의 노력을 배우고 싶다. 어쩌면 어린 날의 나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빠의 다리는 누구보다도 강인한 다리가 분명함을. 놀이터가 되어 주기도, 편안한 베개가 되어주기도 한 여전한 나의 지지대임을.
아빠는 내일도 산에 오를 준비를 한다. 늘 그렇듯 삼각대를 챙기고, 가는 길에 보이는 소나무를 찍고, 새의 노랫소리에 이끌려 올려다본 단풍잎에 깊은 감탄사를 뱉는다. 그저 묵묵히 산을 오르며 또 다른 결심을 지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