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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슬로우소소 Jul 03. 2024

발자취


우연하게도 항상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을 다녔다. 


그래도 교통편이 좋은 곳이었기에 오래 걷거나, 버스 타기를 선호한 날들이다. 

집에서 직장까지의 거리도 한 시간 반. 출근이 늦어 여유는 있었지만 대부분은 자거나, 급하게 밥을 먹는 것 외에는 움직이지 않았다. 언젠가 내 루틴이 어떻게 되냐는 학생의 질문에 정말 없다고 대답할 정도로. 출퇴근하는 시간이 그리 길면서도 기진맥진하느라 안으로만 파고든 것인지.  

    

그나마 제대로 된 운동을 시작한 건 몸이 지쳐버릴 때쯤이다. 

어릴 때부터 지나다닌 집 앞 공원, 내가 택한 운동은 단순히 걷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뒷길에서 팔을 세게 흔들며 파워워킹을 하다 보면 추운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땀도 흘러내렸다. 늘 익숙한 길이었는데 새삼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나무가 이렇게 많았나, 아침이 이렇게 상쾌했나 하고 벤치에도 슬쩍 앉아본다. 


     


그렇게 2월의 끝자락에서 고개를 들어, 3월을 마중 나온 꽃봉오리와 눈이 마주쳤다.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 옆자리에는 곳곳이 뻗어있던 커다란 나무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무는 꼭대기 층에 둥지를 품고, 또 하나의 터전을 허락해 주었다. 푸른 잔디가 나고 있는 축축한 땅은 알게 모르게 참새들의 놀이터가 되어주고, 늘 걸어가던 벽돌 길과 나무 계단 뒤로 몇십 년간 무너지지 않은 단단함에 땀을 쏟은 사람들의 수고를 떠올린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양보 위를 걷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밟고 있는 이 땅이 문득 새로워지는 어느 날, 오늘의 발자취를 남기며 집으로 돌아가는 루틴이 즐겁다. 내일은 이 풍경의 또 다른 면이 보이겠지, 내심 좋아지는 기분을 간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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