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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우리들의 삶

- 상업영화의 주제 의식

by 할수있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 영화는 많은 역할을 했습니다. 계몽주의의 도구로 사람들의 의식을 깨우던 역할도 있었고, 삶의 희망을 잃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던 역할도 있었고, 무료하고 따분한 일상을 깨우던 역할을 할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들의 삶 곁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거나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주거나 좀 더 바르고 나은 삶의 방향성을 제공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무료하고 재미없는 시간을 활력이 넘치고, 재미있는 시간으로 바꿔주기도 했습니다. 모두 긍정적인 역할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영화는 아직 우리들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삶 곁에는 언제나 영화가 있었습니다.


오래된 청춘들은 기억합니다. 얼마되지 않는 수들의 영화들을 보아온 시간을 말입니다. 영상 미디어의 공급이 제한적이었던 시절의 영화는 정말 손을 꼽을만한 수였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지금은 정말 많은 수의 영화속 내러티브를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금 오래된 청춘들은 영화를 통해서 서구의 문명을 접하던 시간들을 기억합니다. 단체로 애국 영화를 관람하던 시기도 기억합니다. 영화를 통해서, 영화가 주는 여운을 통해서 우리를 만들어 오던 시간들을 기억합니다. 제 아무리 상업영화라 할지라도 내러티브의 여운이 없는 영화는 우리의 관심을 얻어내기 힘들었습니다. 어떤 플롯과 메시지로든 영화는 우리에게 깊은 여운을 주었습니다.


그 여운의 대부분은 권선징악적 내용이었습니다. 더 나은 세상, 더 살기 좋은 세상을 위한 사람들의 마음가짐을 다독거리는 그런 내러티브들이었습니다. 정의로우며, 이웃을 사랑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더 잘 살 수 밖에 없다는 그런 것들 말입니다. 물론 요즘의 영화들은 과거의 그런 성향이 많이 사라졌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많은 영화들이 우리에게 주었던 여운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더 나음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상호공존의 감수성을 통해서 개인의 욕망이 이뤄지는 세상을 그렇게 오랫동안 영화라는 내러티브가 보여주었음에도 말입니다. 비약적으로 늘어난 생산량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삶의 질은 높아지지 않았습니다. 돈이 돈을 번다는 경제적 자유라는 이름 아래, 대부분의 우리들은 채무자가 되었습니다. 돈의 많고 적음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을 평가하는 유일한 척도가 되었습니다.


물질주의를 비난하며 착한 척 바른 척 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뜻하고 정깊은 사람들이 정의롭고 살만한 세상에서 만족한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그 많은 영화 속의 주제 의식들을 다시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상업영화의 시간 떼우기의 기능은 점점 더 옅어지고 있습니다. 폭력성과 선정성으로 시간 떼우기의 역할을 대체할 미디어들이 많아졌고,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상업 영화의 역할을 생각할 때입니다. 어렵지 않게, 그리고 편안하게 우리들의 삶을 조망해 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상업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잊혀지고 있는 상호공존의 따뜻한 감수성. 타인의 삶을 바라보며 눈물짓고, 이기심이 아니라 이타심이 인간 본성이라는 생각, 더 나은 삶들을 함께 만들어 가자는 생각.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삶이었고, 세상을 이어온 힘이었다고 주장 한 번 해보고 싶었습니다. 만들고자 하는 내러티브의 주제 의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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