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은퇴이민 생활기
코로나가 일어나기 전에 10월 22일부터 25일까지 3박 4일간 러시안 그룹 20명이 민이네집을 방문하였다.
그해 1월 22일부터 24일까지 Irina와 Anna이란 이름의 러시아 중년여성 두 명이 민이네집에서 이틀을 머물다 간 적이 있다. 자신들은 healer 또는 therapist라고 소개하며 우주의 에너지를 받아서 자연요법으로 치료한다고 하였다.
즉석에서 우리 부부를 엎드려놓고는 자신들의 손바닥을 마주 비빈 후 우리 몸 1센티 정도 위에 위치하여 이리저리 움직이는데 느껴지는 열기가 상당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면서 이런 자연요법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필리핀 힐러(healer)들을 소개해달라고 하는데 우리가 아는 그런 사람이 있어야 말이지 ㅋㅋ
하긴 아주 오래전에 한국 TV에서 모 여성가수의 몸에서 맨손으로 암덩어리를 꺼내는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땐 당연히 속임수라고 생각하였다. 나도 한국에 있을 때 단학선원이라는 기수련원에서 관심을 가지고 우주의 기를 운용하는 체조를 배운 적이 있는데, 손바닥을 약간 거리를 두고 마주하고는 사이에 둥근 공이 있다고 생각하며 두 손을 빙글빙글 움직이면 실제로 공이 있는 것처럼 둥근 물체가 느껴지는 체험을 직접 하였었다.
동양사람들만 이런데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러시아인들이 그러하니 약간 신기하면서도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근데 그 손님들이 이틀을 묵고 가면서 다음에 자신들이 그룹을 만들어서 다시 오겠다고 하였는데 그 당시엔 으레 하는 말인 줄로만 생각하고 별 신경을 쓰지 않고 지냈다.
그런데 웬걸~ 그해 8월 초에 이메일이 오더니 25명의 그룹을 모았으니 숙박비와 관광비, 차량 렌탈비 등을 뽑아달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로부터 수십 차례에 걸쳐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여행일정과 세부사항들을 토의하고 최종 20명으로 결정되어 예약금을 30% 송금받는 것으로 예약이 확정되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버스렌털회사인 PTX에 29인승 버스를 하루 9,500페소에 예약을 하고, 여행지는 따알화산섬, Picnic Grove, People's Park, 팍상한폭포, 88온천 등으로 정하였다.
러시아어를 할 줄 아는 관광가이드를 구해달라고 하였으나 그런 가이드를 구하는 건 불가능하여 내가 대신 동행하여 가이드를 해주기로 하였다. 해당 관광지에 대한 자료를 만들어 인원수대로 준비해 놓고 각 관광지마다 전화를 걸어 예약을 하였다.
드디어 10월 22일 낮 1시 20분에 싱가포르를 경유하여 필리핀항공으로 8명이 도착하고, 밤 11시 20분에 나머지 12명이 베이징을 경유하여 중화항공으로 도착하였다. 나이대가 20~30대부터 50~60대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었는데, 모스크바 한 곳에서 온 것이 아니라 러시아 각지에서 출발하여 이곳 필리핀공항에서 모이기로 했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지난 1월에 먼저 왔었던 Irina의 지도를 받은 제자들이라고 한다. 자연요법치료에 대한 강의를 듣고 일정기간 수료한 후 각지로 흩어져서 활동한다고 하였다. 거칠고 투박한 러시아어로 대화를 하니 정신이 없고 알아들을 수도 없었지만 그중에 몇몇은 영어를 잘하여 그나마 의사소통이 가능하였다.
방마다 2명씩 배정하고 리더인 Irina는 1인실로 배정하였는데 몇 명이 1인실을 추가로 요구하여 12개의 방을 모두 쓰게 되었다.
첫날밤을 그렇게 정신없이 보내고 다음날 아침 9시에 식사를 하였는데 이 사람들은 자연요법으로 건강을 챙기는 탓인지 돼지고기를 일절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를 물어보니 돼지는 뚱뚱하기 때문에 돼지고기를 먹으면 그렇게 살이 찔까 봐 안 먹는다는 다소 의외의 대답을 들었다. 하긴 그룹의 반 이상이 몸집이 상당히 크긴 하더구먼 ㅋㅋㅋ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아침메뉴를 Pork Cutlet(돈가스)로 준비했으니 이 일을 어쩐다 ㅠ.ㅠ
아무도 돈가스엔 손도 대지 않고 Salad와 감자튀김만 가져다 먹는 것이 아닌가???!!! 젠장 젠장~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사람들은 조금의 불평도 하질 않고 나름 맛있게 먹는다.
긍정적인 마인드로 모든 걸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큰 것 같다.
아침을 먹고 나서 10시에 29인승 버스를 타고 따알화산섬으로 이동하는데 차량이 크다 보니 따가이따이에서 바로 내려가질 못하고 산타로사 쪽으로 우회하여 바탕가스로 가는 고속도로를 통해 들어가야 한단다. 20~30분이면 충분히 갈 거리를 빙 돌아가니 1시간 반이 넘게 걸리고 고속도로 톨비가 추가로 들어간다. 예상치 못했던 시간과 돈이 나간 셈이다.
11시 반 경에 트로피칼 리조트에 도착하여 바로 보트를 타고 섬으로 이동하여 말을 타고 산으로 올려 보내고는 혼자 남아서 점심식사를 체크하고 온천물을 확인해 본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1시간여 기다리니 한 명씩 내려오기 시작하여 1시 반 경에 점심식사를 하고 시간관계상 온천욕은 못하고 간단한 샤워만 하고 3시 반 경에 바로 출발하였다.
원래 계획은 따알화산섬 관광 후 따가이따이로 돌아와서 Picnic Grove와 People's Park를 둘러볼 예정이었으나 올 때도 다시 빙 돌아오는데 학교 하교시간과 퇴근시간이 겹쳐서 교통혼잡이 너무 심하여 6시 반경에 따가이따이에 도착하였다. 너무 늦고 어두워져서 두 군데는 가기를 포기하고 대신 마호가니(Mahogany)라는 재래시장에 가서 먹고 싶은 과일을 사기로 하였다.
파인애플, 바나나, 망고스틴, 람부탄, 난소네스 등 각자 원하는 과일을 저렴한 가격에 푸짐하게 사서 숙소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고 자유시간을 가지며 하루 일과를 마무리하였다.
다음날은 팍상한 폭포와 88온천을 가는 날이다.
어제 갔던 길을 다시 똑같이 통과하여 약 2시간 반 걸려서 팍상한 트로피칼 리조트에 도착하였다.
점심으로 갈비탕과 고등어구이를 반반씩 주문해 놓고 방카를 타러 내려가는데 일부 손님들이 비키니 차림으로 갈아입고 나오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온천할 때나 입으라고 수영복을 준비시켰더니 여기서도 폭포에 들어가면 온몸이 젖는다고 하니 아예 비키니를 입고 갈 생각이었나 보다. 땡볕 속에서 1시간 정도를 보트를 타고 가야 하는데 햇빛이 강하여 살갗이 탈 수도 있으니 긴 옷이나 수건 등으로 가리라고 해도 괜찮다며 개의치 않는다.
덕분에 그곳에 온 다른 한국 손님들이 쭉쭉 뻗은 러시아 여성들의 몸매를 잘 감상하였으리라~~~
(나는 괜히 민망하여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했음~ㅎㅎ)
먼저 점심을 먹고 커피를 한잔 마시고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서 2시간여를 기다리니 드디어 흠뻑 젖은 몸으로 유쾌하게 떠들며 도착하기 시작한다. 난생처음 해보는 경험이 짜릿하고 환상적이었을 것이다.
점심을 먹고 출발하여 88온천으로 향하는 도중에 이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오리지널 부코파이 가게"에 들려서 부코파이 5판을 사서 차에 싣고 이동하였다.
온천에 도착한 시간이 3시 반경이어서 2시간 반만 놀다가 저녁 6시에 출발하기로 약속을 하였다.
탈의실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데 20명 중 남자 2명과 여자 18명이 모두 완벽한 수영복 차림으로 나와서 다시 한번 그들의 "햇볕사랑"에 놀랐다. 아마 러시아에서는 날씨가 늘 안 좋고 춥고 칙칙한 날씨가 계속되다가 어쩌다 해가 쨍하고 비치면 옷을 벗어젖히고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그들의 문화가 자유분방해 보이는 것이리라.
할 일 없이 왔다 갔다 하다가 커피 한잔 또 마시고 주스도 한잔 마시고 그러다가 시간이 어느 정도 되어서 5시 반쯤 되니까 제일 아래에 있는 조그마한 Pool로 모여든다. 조금만 더 있다가 가자고 말하려고 다시 한 바퀴 빙 돌아보고 오니 아무도 없기에 부리나케 카운터로 나가보니 벌써 샤워를 다 마치고 자신이 먹은 스낵과 음료 비용을 각자 다 계산하고는 버스 근처에 모여있는 게 아닌가... 그들의 정확한 시간관념과 약속을 지키려는 일사불란함에 또 한 번 놀랐다.
락커룸 키 반납 상태를 확인하고 마무리 계산을 하고 나와 버스에 탑승하고 숙소로 출발하였다.
중간중간에 차가 많이 막히어 숙소에 도착하니 거의 8시가 되었다.
아직도 따끈하고 고소한 부코파이와 함께 늦은 저녁을 맛있게들 먹고 수다를 좀 떨다가 일부는 마사지를 받으러 가고 일부는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얘기꽃을 피운다.
밤 10시경에 모두 취침모드~~~
다음날 25일은 아침을 먹고 La Union 주에 있는 San Fernando 란 곳으로 이동을 한단다.
교통상황에 따라서 버스로 약 6~8시간 걸린다고 하는데 왜 그리 먼 곳을 가느냐고... 거기서 뭘 할 계획이냐고 물으니 그곳에 있는 중국계 Chinese Hotel에 예약을 하였고 5일간 머물면서 워크숍(Workshop)도 열고 근처에 있는 아름다운 Beach에서 놀면서 휴식을 취할 예정이라고 한다.
아침식사를 마치고 모두 모여서 단체사진을 찍는데 갑자기 우리 부부를 부르더니 빙 둘러싸고는 감사의 표시라며 팁을 전달한단다. 20명이서 1인당 100페소씩 2,000페소를 모아서 주는 것이었다. 정말 생각도 못했던 일이라 놀라고 당황스러웠는데 그들의 따뜻하고 흐뭇한 미소를 보니 진정으로 고마워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필리핀에 와서 누군가에게 팁을 받아보기는 난생처음 있는 역사적인(?) 날이었다. 캬캬캬~~~
버스기사에게 렌탈비와 톨비를 지불하고 버스에 탑승한 모든 러시아 손님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하고 내년에 또 만날 것을 기약하면서 헤어졌다.
기억에 오래 남을 즐겁고 독특하고 유쾌한 경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