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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인 Apr 14. 2024

친구들 빡치게 하는 법

내 시간은 금, 상대방 시간은 다이아몬드

나는 아무리 착한 친구라도 화나게 하는 법을 알고 있다. 친구들과 약속을 잡고서 당일 파투를 낸다거나, 3시까지 만나기로 했는데 3시에 집에 나오는 바람에 친구를 30분 동안 밖에 세워두는 방법 등이다. 나는 이 방법으로 전 남자친구도 화나게 만든 적이 있다. 나의 전 남자친구는 말했다. "네 시간이 금이면 남의 시간은 다이아몬드야." 하지만 나는 금이든 다이아몬드든 소중히 여길 능력이 안 되었다. 변명을 하자면 나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 없어서 내 시간도 허투루 쓰는데, 남의 시간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성인 ADHD 환자들에게 이런 증상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는 사실을 어디서 주워 듣곤 나도 이 병에 걸린 건가 싶었다.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과 이 부분에 대해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선생님, 저는 시간에 대한 개념도, 경제 관념도 없어요. 성인 ADHD가 그렇다던데 저도 그렇지 않을까요?" 선생님은 음, 하고 고개를 한번 끄덕이시더니 검사를 해보자고 하셨다. ADHD 관련 검사지를 받고 빠르게 체크 후 제출했다. 결과적으로 난 성인 ADHD가 아니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우울증 또한 감정, 인지 능력 등을 조절하는 중추신경계의 기능이 저하돼서 발병한 것이기 때문에 그런 증상들이 나타날 수 있다고 했다. 변명 같지만, 친구들과 약속을 잘 못 지키는 것은 어느 정도 우울증의 영향도 있다는 얘기다. 물론 전적으로 내 잘못이긴 하다.


친구들과 약속을 해놓고 당일 돼서 파투를 내는 이유는 내 감정이 오락가락해서다. 처음엔 "그날 먼저 집 가는 사람 없기다!"하며 친구들과 약속을 잡았다가 당일이 되면 나가기가 죽기보다 싫다. 특히나 외모 강박이 있는 나는 그날 얼굴이 부었다든가 못생겨보이면 나가기가 100배로 싫어진다. 친구들에게는 아프다는 둥 다른 핑계를 대며 미안하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냥 내가 나가기가 죽기보다 싫어서다. 그래서 친구들은 내가 약속을 또 취소할까 봐 그날 또 안 나오면 죽여버리겠다고 윽박지르곤 한다.


약속 시간에 항상 늦는 이유는 시간에 대한 개념이 '정말로' 없어서다. 우선, 나는 만날 장소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제대로 체크하는 방법을 모른다. 네이버나 카카오 지도로 대략 얼마나 걸리는지 검색해보긴 하는데, 변수까지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다. 가다가 길을 잃거나 반대 방향으로 가는 등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는데 그걸 사전에 인지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나를 너무 과대평가한다. 화장하는 시간은 1시간이면 충분하고, 옷 고르고 갈아입는 시간 5분, 집에서 역까지 걸어가는 시간 10분 등으로 계산하는데 항상 틀린다. 그날따라 나는 화장하는 데 1시간 10분을 소요했고, 옷 고르고 입는 데 10분 이상이 걸렸으며, 집에서 역까지는 엘리베이터 이슈로 인해 15분이 넘게 걸려 버리는 식이다. 게다가 화장이 잘 안 된 것 같으면 나는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예상한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나는 어떻게든 늦을 수밖에 없는 인간으로 설계돼버린 것이다.


나와 친한 친구들은 내가 약속 시간에 늦었을 때 처음에는 화를 내거나 술을 사라고 했었다. 하지만 어떠한 방법도 통하지 않자 이제는 '황혜빈=맨날 늦음'을 공식화해놓고 '황혜빈 타임'을 적용하고 있다. 만약 나와 6시까지 만나기로 했다면, 내가 15~20분은 늦을 것을 고려해 그 시간에 맞춰 나오는 것이다. 친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내 딴에는 이게 편하긴 하다. 나는 '네가 10분을 늦든 1시간을 늦든 나는 상관이 없는데, 왜 그렇게 너는 시간에 집착할까?'라는 뻔뻔하기 그지없는 생각을 한 적도 있다. 정말이었다. 나는 실제로 친구들이 약속 시간에 늦어서 화를 내본 적이 없다. 혼자 코인노래방에 가 있거나 옷을 구경하거나 하는 등으로 시간을 때우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두 핑계일 뿐이다. 어찌됐든 나는 인간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시간 개념을 머리에 박아놔야 한다. 친구들과 7시까지 만나기로 했으면 네이버나 카카오 지도에 안내된 시간보다 30분은 빨리 나가야 하고, 얼굴이 못생겼든 화장이 잘 안 됐든 약속 시간 내에 튀어 나가야 한다. 외모에 대한 강박도 슬슬 내려 놓아야 한다. 내 얼굴이 부었든 못생겼든 아무도 신경 안 쓰고, 다시 내 얼굴을 되찾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보고 있을 나의 친구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 친구들아, 너희의 다이아몬드 같은 시간을 소중히 여기도록 할게. 지금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나를 반성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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