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는 것일까?
어제저녁 식사를 마친 후, 화장실에 가는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 요새 우리 같이 드라마 못 본 지 좀 된 것 같다.
이따금씩 저희 부부는 저녁을 먹으며 드라마를 한 편씩 보고는 합니다. 저희 부부에겐 일종의 루틴이었는데, 한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평소 존경해마지 않던 K선생님 부부는 매일 운동을 함께한 후, 족욕을 하며 함께 드라마를 시청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낭만스러운 시적인 순간이 어디 있을까, 싶어서 저희 부부도 이따금씩 그렇게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왜 그런지 알아? 지난 12월부터 연달아 사건이 터지면서 뉴스만 봐서 그래.
하긴 현실 속에서 낭만을 찾아다닐 수만은 없습니다. 계엄령 사태부터 여객기 참사, 대통령 체포와 구속, 서부지방법원 폭동, 탄핵심판까지 하루하루가 숨 가쁘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저도 나름대로 정부지원사업을 준비하다 보니, 시간의 속도가 배가되어 더 빨리 흘러가는 것처럼 느껴졌던 것만 같습니다.
며칠 전에 꿈을 꾸었습니다. 학교 연단 앞에 선 교장 선생님은 불광불급(不狂不及)을 외치고 있었습니다. 정리되지 않은 진한 눈썹과 쌍꺼풀에 반짝이는 눈매, 짧은 머리에 적당히 주름진 피부, 뭉뚝한 코와 강직한 하관을 가진 교장은 또렷하게 웅변하는 연사였습니다. 그의 발음은 또박또박했고, 그의 제스처는 하나같이 절도가 넘쳤습니다. 그의 연설에는 타협 따위가 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불광불급,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저는 그 말을 무척이나 싫어합니다. 멈출 줄 모르고 폭주하는 광인(狂人)의 객기와 공포가 싫기 때문입니다. 미칠 광(狂)에 쓰인 부수 개 견(犭)과 임금 왕(王)은, 짐승처럼 행동하나 통제할 수 없는 왕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손바닥에 왕(王)을 새긴 누군가(?)가 떠오르는 게 저만은 아닐 겁니다. 그의 손바닥에 견(犭) 자를 덧써야 했던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꿈결에서도 사업계획서를 적어대는 제 모습도 무언가에 미쳐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정말 목적지 어딘가에 당도할 수는 있을까요?! 별나고 복잡한 요지경 세상에서 미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지 딴지를 걸고 싶습니다. 컴퓨터 자판을 두들기다가 쓸데없이 한숨을 쉬어 봅니다. 대통령이나 나나, 누구라도 미쳐야 한다는 강박에 빠진 것은 아닌지 묻고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