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입 시험에 합격했으나 등록금을 내주겠다던 성인이 된 형이 모르쇠하여 초등학교 졸업으로 학업을 마감하고 새벽에 일어나 걸어서 두 시간 거리인 가죽공장에 다니며 물지게를 지던 14살부터 온갖 노동을 하다 전기기술을 배워서 이제 뭐라도 해볼까 의욕을 내는 중에 영장을 받았던 아부지. 시기가 시기여서 베트남전에 참전하게 되었는데 그때 받은 월급을 꼬박꼬박 집으로 송금하였으나, 고등학교 졸업하고 은행에 다니던 위에위에위에 형이 도박에 빠지는 바람에 여차저차해서 홀라당 날아가 제대하고 보니 한 푼도 남지 않았더란다.
20대 후반에 무일푼이 된 아부지가 중매쟁이의 허풍 덕에 전쟁에 아버지를 잃어 쌀밥은 못 먹었어도 굶지는 않는 농촌 사람이었던 그와 결혼한 게 1970년이다. 결혼이라고 하긴 했으나, 겨우 세 번 만난, 택시 다섯 대 굴리는 집 다섯 째 아들이 아니라 운전 기술은 있지만 잘 쓰이지 않는, 작은 택시회사의 스페어 기사였던 잘 모르는 남자와 여인숙 단칸방에 곤로 하나 놓고 시아버지에, 주변에 흩어져 사는 시가 식구들까지 챙겨야 했던 스물넷의 그는 그 상황이 얼마나 무섭고 어렵고 힘겹고 싫었을까.
도시의, 잘 사는 집에 시집보냈다 여긴 딸이 힘겹게 산단 소식을 어찌어찌 전해 듣고 상경한 외할머니가 딸집에 며칠을 머물렀다 떠나며, 영 아니다 싶으면 너를 아예 데리고 가려고 왔는데 사위 하는 걸 보니 제대로 된 일자리를 못 구해서 그렇지 사람이 성실하니, 한 번 살아보라 하셨다고.
외할머니가 딸의 집에 찾아간 그때가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외할머니가 그를 데리고 돌아가버렸으면 일찌거니 그의 뱃속에 들어, 굶기를 밥 먹듯이 하던 모체의 어금니까지 빼먹으며 무럭무럭 자라는 태아였던 나는 어찌 되었을까.
어린시절부터 이따금 실제로는 경험해 보지 못한 극한 가난에 대한 불안과 깊고 어두운 공간으로 추락할 것 같은 공포에 시달리곤 했는데, 나이 들어 그에게 들은 결혼 초기, 내가 그의 뱃속에 있을 때 그가 느꼈을 두려움과 불안과 외로움과 서러움과 실제 상황의 배고픔을 함께 겪었기 때문일까 생각하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