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같이 쓰실래요?"
제가요.
머리숱이 많은 편이에요.
그래서 수영 강습이 끝나고 머리를 대충 말리고 나오면
사자머리가 됩니다.
음...
어느 정도냐면..
제 머리 크기가 두 배로 커집니다.ㅎㅎ
사실 너무 왕초보라 주위를 둘러볼 겨를이 없기도 하고
수영이 끝나면 출근하기 바빠서 사람들 얼굴을 잘 모르겠더라고요.
무엇보다..
저는 눈이 나쁘거든요.
안경을 벗고 수영장에 들어가면 사람들 얼굴이 잘 구분이 안 가요.
수경에 도수도 안 넣어서 잘 보이지도 않거든요.
그날은 7시 수영을 마치고
부랴부랴 출근하는 길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제가 다니는 수영장이 지하에 있는데
지상으로 나가는 길이 두 개가 있습니다.
처음엔 수영하고 두 달 동안 길이 한 개만 있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세 달 만에 길이 하나 더 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잠깐 그 얘기를 해보자면요.
수영장 건물 옆에 회사 건물이 있거든요.
그런데 매일 새벽마다 회사원 복장이 아닌 사람 한두 명이
자꾸 회사 정문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뭐지? 뭐지? 하다가
용기를 내어서 따라 들어갔어요.
경비원 선생님이 계셔서 얼마나 떨렸는지 몰라요.
저보고 왜 들어왔냐고 뭐라 할까 봐 엄청 긴장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인사했어요
"안녕하세요."
그리고 두리번 두리번거리는데
진짜 신기하게 회사 건물 아래층이
체육센터 수영장과 이어져 있더라고요.
수영장 가는 길이라고 친절하게 입간판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와~~ 진짜 용기 내길 잘했네.
지름길 알았다. 아싸!'
라고 생각하면서 시간이 여유가 있는 날은 원래 길로
빠듯한 날은 지름길로 올라갔습니다.
그날은 출근 시간이 빠듯해서
지름길로 가려고 계단으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누가 계단을 올라가지 않고 저를 빤히 보는 거예요.
'뭐지?'
라고 생각을 하면서 계단 위를 쳐다봤더니 수영 강사님이시더군요.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고 그냥 가려고 하는데
저를 기다리시더라고요.
그래서 졸지에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마침 비가 왔어요.
수영 강사님은 우산이 없었습니다.
"우산 같이 쓰실래요?"
라고 여쭤보긴 했지만 물어보자마자 후회했습니다.
'아... 남자랑 같이 우산 쓰고 가는 건 좀 그렇긴 하겠다.'
다행히(?) 괜찮다고 해서 나란히 같이 걸어갔습니다.
"저는 이쪽으로 가요. 안녕히 가세요."
하고 갈림길에서 헤어지나 싶었는데 강사님께서 그러시더군요.
"저도 이쪽으로 갑니다. 이 근처 사세요?"
"아뇨, 여긴 직장 근처예요."
잠시 침묵이 흘렀어요.
침묵이 불편해서 제가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새벽에 강사 일도 하시고 진짜 부지런하신 것 같아요."
"저는 뭐 이 근처 살아서 괜찮아요."
그리고 취준생이라 돈도 좀 벌어야 하고 제가 수영을 좀 좋아해서요.
수미자 들어봤어요?"
"아뇨."
"수영에 미친 자라고 그게 저예요. 수영대회에도 나가고 아직도 매일 수영하고 수영강습도 받고 그래요."
어.. 어... 어랏..
그런데 왜 동선이 계속 같을까요.
이러면 안 되는데..
"저는 여기로 가야 합니다.
하하. 여기가 제 직장이라서요"
"아~그러세요? 저도 이 동네 사니깐 지나가다 보면 인사 나눠요."
"네, 안녕히 가세요."
이렇게 해서 제 직장이 공개되었습니다.
여기로 가야 한다고 할 때 여기가 제 직장이었거든요.
이미 직장 앞에서 사람들이 저에게 인사를 건네는 상황이라 뭐 연기를 할 수도 없었어요.
직업이 알려진 게 너무 찝찝했지만 뭐 어쩌겠어요.
다음번 수영 강습에서 강사님을 만났습니다.
"회원님 많이 느신 거 아세요?"
"아 그래요? 전 아직 잘 모르겠어요."
갑지가 사람이 너무 달라졌어요.
저에게 일부러 말을 걸어주시더군요.
그리고 칭찬을 해주셨어요.
그리고 그 이후로도 한 마디씩 꼭 말을 걸어주셨어요.
감사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고 뭐 그런 감정이 들었던 것 같아요.
수영강사님께서 친절해지신 이후로 한 달정도 지났을거예요.
수영강사님께서 그만두신다고 하더군요.
'취직이 되셨나 보다. 축하할 일이네.'
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다른 수영장으로 옮긴다는 것 같았습니다.
강사님은 출근 마지막 날에 무단결석을 했습니다.
중급반 강사님도 상급반 강사님도 황당한지
초급반 선생님 두둔해주지 않더라고요.
초급반에서 말씀이 많으신 어머님께서 중급반 선생님께
"오늘 선생님 왜 안 나왔어요?"
라고 여쭤보셨어요.
말이 떨어지기도 무섭게 중급반 선생님께서 그러시더군요.
"몰라요. 말도 없이 안 나와서 우리도 황당해요."
아무튼 그렇게 그 강사님과의 인연은 끝이 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