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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머리앤 Apr 20. 2024

수영시간에 큭큭 거린 이유

- 새벽 수영 시간에 만난 귀인

'오늘, 그분도  오시겠지?'


사실 수영장에 가는 유일한 낙이 하나 있었는데요.

저에게 소소한 즐거움을 주시는

50대 정도로 보이시는 아저씨였습니다.


6시 초보반은 수업이 시작하면

회원들이 일렬로 걸어서 한 바퀴 레일을 돌고 옵니다.

레일 끝까지 돌아서 반대로 다시 되돌아갈 때 

서로 얼굴을 마주 보게 되잖아요.

그때가 인사를 건네지 못한 분들께 인사하는 타이밍입니다.

그분은 늘 미스터빈처럼 인사를 했어요.

(반갑습니다. 미스터빈을 아신다면 저와 비슷한 또래이거나 더 연배가 있을 수 있겠네요.^^)


그분은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면서 

고개를 한 번만 끄덕이는 게 아니고

세네 번 이상 계속 끄덕이세요.

미스터빈 행동이 좀 과장스럽고 

몸이 약간 연체동물처럼 흐느적흐느적 거리잖아요.

딱 그 느낌입니다.ㅎㅎ

그러고 보니

미스터빈과도 외모가 닮으셨던 것 같아요.


그분은 수영장에서 걸을 때도 자세가 재미있었어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몸이 균형이 딱 잡혀있는 게 아니라

약간 좌우가 비대칭으로 헐렁헐렁 움직인다고 해야 하나..

설명이 너무 어려운데 

다른 사람보다 몸의 움직임이 상당히 컸습니다.

그걸 뒤에서 보는 저는

혼자 큭큭하면서 웃음을 터트리곤 했습니다.


걸어서 레일을 한 바퀴를 돌고 오면 

각자 킥판을 한 개씩 잡고 발차기로 한 바퀴를 돌고 옵니다

그 후에는 발차기를 한 번 더 할 때도 있고

자유형을 연습할 때도 있습니다.

그건 강사님 마음입니다.ㅎㅎ


그런데요. 

레일을 걸어서 한 바퀴를 돌고 오면 

그분은 항상 수영장 밖으로 나가셨어요.

어딜 가냐고요?

유아풀로 갑니다.

그리고 수업시간 내내 거기서 발차기를 해요.

엄청 힘들 것 같은데 계속 발차기만 해요.

자발적 발차기 연습생이셨어요.


저렇게 지루한 발차기를 어떻게 매일 하실까라는 궁금증이 생겨서

하루는 여쭤봤어요.

"저기서 발차기만 하시면 힘들지 않으세요?"

"발차기가 너무 안 돼요. 발차기가 안되면 수영이 안돼."

"그래도 50분 내내 발치기만 하려면 너무 힘드실 것 같은데

여기 오셔서 하세요."

말씀을 드려도 매번 그쪽으로 가셨습니다.


수영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유아풀을 바라보면

그분은 쉬지 않고 발차기를 하고 계셨어요.

그러면 저는 마음을 다잡고 다시 수영을 했습니다.ㅎㅎ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분은 원래 초보반이 아니셨다고 해요.

중급반인데 

발차기가 안된다고 생각해서 

자진해서 초급반으로 내려오셔서 발 치기 연습을 했다고 하십니다.


아쉽게도,

그분은 몇 달 후에 사라지셨어요.

이사를 가신 건지 

다른 수영장으로 옮기신 건지

아니면 발차기가 너무 힘들어서 그만두신 건지

마지막 인사도 못 나눈 것 같은데...


그분께 짧은 편지글 남겨봅니다.


이름 모를 아저씨께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나요?

수영을 계속 배우고 계시다면

그곳에서도 계속 발차기만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덕분에 힘들었던 왕초보 수영 시간에 

유일한 즐거움이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성함이라도 알 수 있을까요?

성함을 부르면서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어서요.^^

늘 항상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 잘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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