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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머리앤 May 06. 2024

장점이 단점이 된다는데

- 그 시기가 너무 빨리 온 것 같아요.

"피아노 네가 치려고 산 거야?"

신혼집에 놀러 온 사람들이 꼭 물어봐요.

"아뇨. 저는 피아노는 잘 못 쳐요. 남편 거예요."

"남편이 피아노도 칠 줄 알고 멋지다."


네... 멋져요.

멋진데요. 

저는 악기를 잘 연주할 줄 아는 남자가 멋있어 보였지

그 악기를 꼭 집에 두고 연습하는 남자가 멋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래서 신께 기도를 할 때에는 아주 구체적으로 해야 하나 봐요.


"악기는 연주할 줄 알되

결혼 전에 이미 그 악기를 가지고 있거나

악기가 조그마해서 신혼집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악기였으면 해요."

이런 식으로요.


'결혼을 하고 싶은 남자의 특징을 적어보라고?'

책 제목은 기억나지 않아요.


20대 중반에 읽었던 책에서

어떤 사람과 결혼이 하고 싶은지 적어보라고 했던 것 같아요.


책에서

적어보세요. 생각해 보세요.

이런 문구가 나오면 그냥 넘겨버렸거든요.


그날은 신기하게 

'적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상 구석에 있는 흰 종이를 하나 꺼내서 적기 시작했습니다.


가만 보자.... 뭐라고 적어야 하나....

생각나는 대로 

많이 적을수록 좋다고 해서 

줄줄 써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쉬울 줄 알았는데 막상 적으려니깐 잘 모르겠더라고요.

책에 나온 예시를 몇 개 따라 쓰다 보니 

제가 적고 싶은 것들이 하나둘씩 추가가 되었습니다.


키 큰 남자

대화가 통하는 남자

호리호리한 남자

내가 존경할 수 있는 남자

마음이 따뜻한 남자

악기를 하나 연주할 줄 아는 남자

잘 들어주는 남자

외국어를 잘하는 남자

건강한 남자

등등...


이었던 것 같아요.

고민하면서 간신히 20개 정도 적었어요.

현실에 존재할까 싶을 정도로 아주 멋진 남자가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다 적고 나서 

책의 그다음 구절을 읽었습니다.


적은 것 중에 가장 먼저 버릴 수 있는 걸 3개 지우래요.


또 지우래요.


또 지우라고 하더군요.


3개가 남았어요.


내가 존경할 수 있는 남자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남자

건강한 남자


1개를 남기고 다 지우래요.


그래서 남은 게

내가 존경할 수 있는 남자였어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여자는 피아노, 남자는 태권도였던 것 같아요.

(남녀차별을 의도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혹시 불편하셨다면 죄송해요. 

그냥 그 시절엔 그런 친구들이 많았거든요.

요즘에는 성별 관계없이 피아노와 태권도를 같이 배우는 친구들이 많더라고요.)


저는 친구들이 피아노를 배우는 기간만큼 미술학원에 다녔어요.

잠시 피아노 학원을 다니긴 했는데 바이엘까지 배웠던 것 같아요


제가 연주할 줄 아는 악기가 딱히 없으니깐 

약기를 잘 연주하는 사람이 멋있어 보였나 봐요.


그러고 보니 비슷한 조건의 남자랑 결혼을 하긴 했..... 네..... 요....


결혼 전에는 

남편이 피아노 학원에 장소 대여비를 주고 

주말에 한두 번 피아노를 치러 갔습니다.

결혼 후에도 

피아노학원에 가서 연습하면 될 것 같은데

꼭 사야 한다고 하네요.


"중고나라에 올라온 전자피아노가 있거든.

부인이 태교를 한다고 샀는데 거의  안 쳤데."


"그래서 얼만데?"

"70만 원"


"좀 깎아달라고 해봐."


남편은 깎는 걸 무지 싫어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못해 문자를 보내요.


'안녕하세요. 전자피아노를 사고 싶습니다. 혹시 깎아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 지금이라면 이렇게 보내라고 할 것 같긴 합니다.


'안녕하세요. 

중고나라에 올린 전자피아노가 사고 싶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지금 다른 제품과 고민 중인데 그분은 5만 원을 깎아주신다고 하셨거든요. 

만약 사장님께서 에누리를 해주신다면 사장님 피아노를 살까 하는데 깎아주실 수 있을까요?')


상대방은 정말 새거나 다름없다면서 절대 안 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안된데. 그냥 사자."


서울 북쪽 어디쯤이었던 것 같은데

남편은 먼 거리를 군말 않고 운전해서 

전자피아노를 사 왔습니다.


그렇게 우리 집 물건이 하나 더 추가되었습니다.


디드로효과라고 아시죠?

물건 하나를 구매하면 

그와 관련된 다른 상품들도 연쇄적으로 구매하는 현상을 말하는 건데요.


남편이 딱 그랬어요.

전자피아노를 사고 났더니 

밤에 피아노를 치려면 헤드폰을 사야 하고 

헤드폰을 샀더니 잭이 안 맞는다며 

잭도 사달라 하고

전자피아노에 먼지가 내려앉으니 피아노커버도 사달라더군요. 


그렇게 해서 좁은 신혼집에

전자피아노가 거실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한 달 정도는 남편이 뭘 사겠다는 말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젠 빚을 좀 갚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는데

남편이 저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보, 아빠 환갑잔치를 하신대."

"환갑잔치? 요즘엔 직계가족끼리 식사하지 않아?"


"직계 말고. 

아빠 형제들 포함해서 자녀들도 오고 하면 50명은 오실 것 같은데?"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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