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시기가 너무 빨리 온 것 같아요.
"피아노 네가 치려고 산 거야?"
신혼집에 놀러 온 사람들이 꼭 물어봐요.
"아뇨. 저는 피아노는 잘 못 쳐요. 남편 거예요."
"남편이 피아노도 칠 줄 알고 멋지다."
네... 멋져요.
멋진데요.
저는 악기를 잘 연주할 줄 아는 남자가 멋있어 보였지
그 악기를 꼭 집에 두고 연습하는 남자가 멋지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래서 신께 기도를 할 때에는 아주 구체적으로 해야 하나 봐요.
"악기는 연주할 줄 알되
결혼 전에 이미 그 악기를 가지고 있거나
악기가 조그마해서 신혼집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악기였으면 해요."
이런 식으로요.
'결혼을 하고 싶은 남자의 특징을 적어보라고?'
책 제목은 기억나지 않아요.
20대 중반에 읽었던 책에서
어떤 사람과 결혼이 하고 싶은지 적어보라고 했던 것 같아요.
책에서
적어보세요. 생각해 보세요.
이런 문구가 나오면 그냥 넘겨버렸거든요.
그날은 신기하게
'적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책상 구석에 있는 흰 종이를 하나 꺼내서 적기 시작했습니다.
가만 보자.... 뭐라고 적어야 하나....
생각나는 대로
많이 적을수록 좋다고 해서
줄줄 써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쉬울 줄 알았는데 막상 적으려니깐 잘 모르겠더라고요.
책에 나온 예시를 몇 개 따라 쓰다 보니
제가 적고 싶은 것들이 하나둘씩 추가가 되었습니다.
키 큰 남자
대화가 통하는 남자
호리호리한 남자
내가 존경할 수 있는 남자
마음이 따뜻한 남자
악기를 하나 연주할 줄 아는 남자
잘 들어주는 남자
외국어를 잘하는 남자
건강한 남자
등등...
이었던 것 같아요.
고민하면서 간신히 20개 정도 적었어요.
현실에 존재할까 싶을 정도로 아주 멋진 남자가 머릿속에 그려졌습니다.
다 적고 나서
책의 그다음 구절을 읽었습니다.
적은 것 중에 가장 먼저 버릴 수 있는 걸 3개 지우래요.
또 지우래요.
또 지우라고 하더군요.
3개가 남았어요.
내가 존경할 수 있는 남자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남자
건강한 남자
1개를 남기고 다 지우래요.
그래서 남은 게
내가 존경할 수 있는 남자였어요.
제가 어릴 때만 해도
여자는 피아노, 남자는 태권도였던 것 같아요.
(남녀차별을 의도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혹시 불편하셨다면 죄송해요.
그냥 그 시절엔 그런 친구들이 많았거든요.
요즘에는 성별 관계없이 피아노와 태권도를 같이 배우는 친구들이 많더라고요.)
저는 친구들이 피아노를 배우는 기간만큼 미술학원에 다녔어요.
잠시 피아노 학원을 다니긴 했는데 바이엘까지 배웠던 것 같아요
제가 연주할 줄 아는 악기가 딱히 없으니깐
약기를 잘 연주하는 사람이 멋있어 보였나 봐요.
그러고 보니 비슷한 조건의 남자랑 결혼을 하긴 했..... 네..... 요....
결혼 전에는
남편이 피아노 학원에 장소 대여비를 주고
주말에 한두 번 피아노를 치러 갔습니다.
결혼 후에도
피아노학원에 가서 연습하면 될 것 같은데
꼭 사야 한다고 하네요.
"중고나라에 올라온 전자피아노가 있거든.
부인이 태교를 한다고 샀는데 거의 안 쳤데."
"그래서 얼만데?"
"70만 원"
"좀 깎아달라고 해봐."
남편은 깎는 걸 무지 싫어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못해 문자를 보내요.
'안녕하세요. 전자피아노를 사고 싶습니다. 혹시 깎아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 지금이라면 이렇게 보내라고 할 것 같긴 합니다.
'안녕하세요.
중고나라에 올린 전자피아노가 사고 싶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지금 다른 제품과 고민 중인데 그분은 5만 원을 깎아주신다고 하셨거든요.
만약 사장님께서 에누리를 해주신다면 사장님 피아노를 살까 하는데 깎아주실 수 있을까요?')
상대방은 정말 새거나 다름없다면서 절대 안 된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안된데. 그냥 사자."
서울 북쪽 어디쯤이었던 것 같은데
남편은 먼 거리를 군말 않고 운전해서
전자피아노를 사 왔습니다.
그렇게 우리 집 물건이 하나 더 추가되었습니다.
디드로효과라고 아시죠?
물건 하나를 구매하면
그와 관련된 다른 상품들도 연쇄적으로 구매하는 현상을 말하는 건데요.
남편이 딱 그랬어요.
전자피아노를 사고 났더니
밤에 피아노를 치려면 헤드폰을 사야 하고
헤드폰을 샀더니 잭이 안 맞는다며
잭도 사달라 하고
전자피아노에 먼지가 내려앉으니 피아노커버도 사달라더군요.
그렇게 해서 좁은 신혼집에
전자피아노가 거실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한 달 정도는 남편이 뭘 사겠다는 말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젠 빚을 좀 갚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는데
남편이 저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여보, 아빠 환갑잔치를 하신대."
"환갑잔치? 요즘엔 직계가족끼리 식사하지 않아?"
"직계 말고.
아빠 형제들 포함해서 자녀들도 오고 하면 50명은 오실 것 같은데?"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