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안 괜찮아. 너를 처음 만났을 때 호감이 가고 좀 어리면 어때? 너랑 사귀면 어떨까. 생각도 했어.”
“근데? 지금은? 어떻는데?”
“그런데 아무래도 우리는 안 될 것 같다. 앞으로는 그냥 정말 누나 동생사이 때론 친구처럼 지내자. 가끔 소주도 한잔 하고, 그게 나을 거야정식으로 우리가 사귀다 보면 아마 우리는 큰 싸움하고 헤어져서 평생을 못 볼 것 같아. 그렇게 되는 거보다 지금처럼 우리 편하게 서로에게 집착하지 말고 지내자. 뭐 우리는 사귀었던 사이도 아니었으니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지금처럼 이면, 뽀뽀도 하고 그러는 거제?”
“어이구 인간아! 뽀뽀만 해줄게.”
“안된다. 어떻게 뽀뽀만 하노?”
먼저 만나자고 한 것도 나였는데, 먼저 누나에게 호감을 보이고 표현한 것도 나였는데, 누나는 내가 이야기를 꺼내지도 않았는데도 내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먼저 이야기한 것 같다.
나는 여름 방학 동안 일주일에 한 번 선미누나 휴무에 맞춰서 마산 가고, 하루는 선영이와 보내며, 가끔은 영희를 만나 영화보고 밥 묵고 했다.
어쩌다 밤이 되면 집에 들어가기 전에 학교에서 늦게까지 보충수업하고 오는 말자 마중하러 가서 같이 집에 들어간다.
그렇게 나는 아슬아슬한 생활을 하며 여름방학이 끝이 났다.
“여보세요? 사장님 혹시 병팔이나 누구 왔어요? 삐삐 호출이 들어와서요?”
“병팔이 있네. 잠시 있어봐라.”
당구장이다. 당구장 사장님도 우리를 별명으로 부른다.
“어. 왜? 밤에 무슨 일인데?”
“일단 빨리 나온나? 철수 이 새끼 사고 쳤나 보더라. 싸웠는가 보더라. 일단 당구장으로 빨리 온나?”
“누구랑 싸웠는데..”
‘뚜뚜뚜’ 말하는데 전화를 끊은 거 같다.
나는 대충 반바지를 입고 현관문을 연다.
“일찍 들어오너라?”
아버지가 안방문을 열고는 한마디 하신다.
“네. 요 앞에만 갔다 올게예.”
“니 어디가노?”
이층에서 내려오는 말자다.
“니는 어디가노?”
“내는 슈퍼에 생리대 사러 간다. 왜? 니가 사다 줄래?”
“미친... 왜? 기저귀 사다 줄까?”
“니 또 누구 만나러 가노? 어느 가시나 만나러 가노?”
“시끄럽다. 병팔이 만나러 간다. 빨리 기저귀나 사서 들어가라. 그라고 가시나야 바지가 그게 뭐고? 빤쥬가? 으이구.”
“니는 맨날 내 바지 가지고 지랄이고? 옷도 안 사주면서, 일찍 들어온나? 쓸데없는 년들 만나지 말고.”
당구장에 올라가니 병팔이가 멍하게 앉아 있다.
“무슨 일이고?”
“앉아봐라. 어찌해야 하노? 지금 철수 이 새끼 터져서 눈팅이 반팅이더라.”
“누구한테 발렸나?”
“저기 밑에 동네 애들인가 보던데 너그 학교 교복이다고 하더라.”
“우리 학교? 철수는 어딨노?”
“저그 아버지한테 잡혀서 집에서 못 나오고 있다.”
“알아야 누군지 만날 거 아니가?”
“미자 잠시 오라고 했다.”
“미자는 왜? 같이 있었나?”
“미자 가시나가 철수랑 싸워서 안 볼 때 있었다 아이가? 그때 미팅했는데 언 놈이 미자 좋다고 쫓아다녔는가 보더라.”
“미치겠다. 가지가지한다. 세상에 눈 삔 새끼가 왜 이리 많노? 그래서?”
“그걸 철수한테 이야기했는데 철수가 그 새끼 찾아가서 한 대 쥐어박고, 오늘 다구리 당한 거 같다.”
“미치겠다. 그래서 우리가 또 그걸 잡으러 가자고? 병팔아! 니도 갈수록 철수 닮아 가나?”
“지랄! 누구를 닮아가? 누가 또 잡으러 가자나? 어찌할까? 물어보는 거잖아? 그래도 철수가 쥐어 터졌는데 가만히 있나? 이 새끼 나쁜 놈이네.”
“그래 그건 그렇네. 근데 그 새끼는 미자를 왜 쫓아다녔데? 미치겠다. 미자의 매력이 뭔데?”
“내 말이. 그걸 알 수가 없다. 일단 미자 오면 누군지 물어보자. 이름 알면 니 알 수도 있다 아이가?”
그렇게 우리는 나란히 앉아 요구르트를 꼭 뒤에 구멍을 내서 빨아먹고 있다.
“오~ 미자. 오래만이야?”
“왜? 밤에 오라 가라 하노?”
“야! 가시나야. 너그 철수 놈이 쥐어터져서 어찌할까? 어떤 놈인지 물어보려고 불렸지. 몇 놈한테 쥐어 터졌는데?”
“몇 놈은 무슨? 내가 몇 놈한테 터졌으면 너그한테 말했지. 한 놈한테 한 대 맞고 눈팅이 반팅이 됐다.”
“철수가 한 대 맞고 가만있었다고? 철수 새끼 깡다구가 있어서 달라붙을 건데?”
“하하 철수님 한 대 맞고 잠시 기절한 거 같더라. 기절한 것인지 겁이 나서 기절한 척한 것인지 내가 쪽팔려서. 그라고 그 새끼는 한 대 때리고 갔다.”
“그 새끼가 뉜데? 이름이 뭔데?”
“이름은 모른다. 내랑 미팅한 애는 이정현이고, 그 애 친구인가 보던데, 키가 차돌이만 하고, 덩치가 니하고 병팔이하고 합친 거 만하더라.”
“킹콩한테 맞았네. 그 새끼는 못 이긴다.”
“킹콩? 킹콩이 누고? 잘 치나?”
“말 그대로 우리 학교 킹콩이다. 애는 착하다. 먼저 시비는 안 건다. 일단 내가 내일 학교 가서 만나볼께.”
“야! 일어나 봐라.”
“왜? 왜? 벌써 집에 갈시간이가?”
쥐똥이가 야자(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우리 반까지 와서 나를 깨운다.
“나가자. 지금 난리다. 철수 놈 새끼가 킹콩이 찾아왔나 보다.
한판 붙자고.”
“뭐라노? 아 이 꼴통 새끼 그래서 어딨노?”
“저기 운동장 철봉 밑에.”
“혼자?”
“몰라. 그런가 보다. 가보자.”
“아! 씨발 킹콩은? 킹콩은 내려갔나?”
“몰라. 아직 안 갔나 보던데?”
우리는 몰래 복도를 나와 탈출했다.
“야. 강철수! 야 이 미친놈아!”
“어! 이야기 들었나? 내 쪽팔려서 조용히 왔는데 너그 귀에도 들어갔나?”
“야! 이 미친놈아! 킹콩 만나기 전에 당직 샘한테 걸리면 쫓겨난다.”
“뭐! 내가 죄지었나?”
근데 철수 옆에 커다란 가방 두 개가 있다.
“저 가방은 뭐고?”
“내 오늘 학교 때려치우고 집 나왔다. 킹콩인가 고릴라인가 그 새끼랑 한판 붙고 마산 갈 거다.”
“마산? 민호 형님한테?”
“응! 공부도 안 맞고 집에서도 맨날 때려치우라고 하는데 말라고 다닐 기고 일찍 돈이나 벌란다.”
“그래도 고등학교는 나와야지. 일단 가자.”
나는 철수를 끌고 나간다.
“야! 거기 서봐라.”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린다.
킹콩이다.
“아! 이 새끼 나왔네? 가자. 어디서 한판 할까?”
“한판은 무슨 가만히 좀 있어봐라.”
나는 철수를 말리고 킹콩한테 간다.
“최현구! 내랑 이야기 좀 하자.”
현구는 킹콩 이름이다.
“뭐꼬? 니 점마 친구가?”
나는 킹콩이를 데리고 저쪽 구석으로 간다.
“내 불알친구다. 그라고 물론 다이다이 깨면 니가 이기겠지만, 그렇다고 점마도 순순히 넘어갈 놈 아니다. 이야기 들어보니깐 니하고는 상관도 없더구만 정현이 새끼가 잘못해서 한 대 맞았다 카던데.”
나는 킹콩을 설득했다.
단순한 놈이라 설득도 편했다.
“야! 강철수 와서 서로 풀어라.”
나는 격투기 심판이 된 것처럼 둘이를 악수시킨다.
“그래. 킹콩아! 들어가서 공부해라. 다음에 시간 되면 같이 보자.”
나는 킹콩이를 교실에 보내고, 셋은 당구장으로 간다.
“그래서 자퇴서 제출했나?”
“자퇴서는 무슨? 내일부터 학교 안 가면 퇴학시키겠지.”
“그래서 뭐 할 건데?”
“뭘 자꾸 그래서고? 일단 민호 형님 집에 살면서 배달 아르바이트나 해서 돈 벌어야지.”
“뭐가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니 결정이다고 하니깐 니 알아서 해라.”
“알았다. 놀러 온나. 내가 돈 벌어서 맛있는 거 많이 사줄게.”
나는 철수를 다시 설득시킬 수도 없었다.
철수는 아버지랑 둘이 산다,
철수 아버지는 택시 운전을 한다.
평상시는 집에 잘 안 들어오는데, 술을 드시고 가끔 들어오실 때는 식구들을 그렇게 때리고 살림을 다 뿌수시고 그런다고 한다.
그걸 못 참고 엄마는 철수 동생을 데리고 나가서 따로 사신다.
매번 철수보고 엄마 잡아오라면서 철수를 때리는 것 같다.
그래도 철수는 가끔 엄마하고 동생은 만나고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철수는 친구들 중에서 제일 먼저 독립해서 사회생활에 뛰어들었다.
나는 그런 철수의 선택을 존중해 줄 수밖에 없다.
“밥 먹자.”
쥐똥이가 도시락을 꺼낸다.
“니는 꼭 우리 반에서 밥 먹어야겠나? 너그반에서 먹어라.”
“이 새끼는 언제는 안 온다고 뭐라 하더니만, 내일 차돌이 결승이라더라.”
“그래! 그라면 가야 하는데? 어쩌노? 어떻게든 도망가야 되는 거 아니가?”
“으이구! 내일 토요일이다. 마치고 가도 된다. 정신 차리라.”
“내일 그라면 차돌이한테 갔다가 한잔하나?”
“근데 요즈음 말자 아침에도 안 보이더라. 전에는 학교 갈 때 종종 봤다 아이가? 근데 안 보이더라.”
“니 아직 말자가 좋나?”
“그런 게 아니고, 그냥 말자 보면 편안해진다. 뭐 막 사귀야겠다 그런 게 아니고, 뭔지 알지? 가만히 보고만 있어도 좋은 거.”
“뭔지 모른다. 나는 막 안 좋다. 그라고 니는 공부 좀 해라. 맨날 놀 생각만 하노?”
“지는?”
“왜 이리 사람이 없노? 너무 썰렁한 거 아니가? 그래도 전국체전 결승인데.”
“테니스가 비인기다. 내라도 안 좋아하겠다. 애들 시커멓게 타 가지고 못생기고 그렇다 아이가.”
우리는 응원하기 좋은 자리보다 몰래 물병에 담아 온 소주 먹기 좋은 구석 자리를 찾는다.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아도 같은 곳으로 향한다.
“여기가 딱 좋다.”
“철수가 없으니깐 좀 썰렁하기는 하다.”
“조용하고 좋네. 근데 그 새끼 잘 지내나?”
병팔이가 나한테 묻는다.
나는 주말 되면 가끔 마산에 가서 보고 오고 했다.
“열심히 배달하면서 잘 지낸다, 저 차돌이 나온다. 차돌이 파이팅! 이기라.”
“지면 볼 생각하지 마라. 그냥 뒤지 뿌라.”
차돌이는 긴장도 안 한 것 같고 컨디션도 좋아 보인다.
우리 쪽을 한번 쳐다보고 손을 흔들더니 저쪽으로 뛰어간다.
“멋있다. 차영석!”
나는 힘차게 외쳤다.
근데 이놈이 나를 다시 안 쳐다보고 간다.
혼자 멀뚱멀뚱하게 앉아 있는 여자한테 가서 손을 흔들고 뭐라고 이야기하는 게 보인다.
“저 가시나 누고? 가볼까?”
“차돌이 여자 생겼나?”
“아 저 새끼 운동 안 하고 여자 만나고 다닌 것 같은데? 게임 졌다. 뻔하다.”
“부정 타는 소리 하지 마라. 근데 누구지? 억수로 궁금하네?”
“나중에 물어보자. 시작한다. 차영석 파이팅!”
우리 세 놈은 목이 터지라 외친다.
근데 테니스라는 게 너무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경기는 우리 관심 밖이다.
“씨발! 이게 왜 아웃이에요? 인이죠!”
갑자기 차돌이 고함 소리에 우리는 운동장을 다시 쳐다본다.
어떻게 됐는지 모르지만 차돌이의 어필은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시 경기는 재개된다.
우리도 집중해서 다시 본다.
“아웃”
심판이 ‘아웃’으로 인정한다.
내가 봐도 이번 공은 ‘인’으로 보였다.
우리는 “인”을 외친다.
갑자기 차돌이는 코치진을 쳐다본다.
웃긴 게 코치진은 차돌이의 눈을 외면하는 듯 보인다.
“아이~ 씨발! 이게 무슨 아웃입니까? 몇 번째입니까?”
차돌이는 심판에게 한발 한발 다가서면서 말하는 소리가 관중석까지 들린다.
한참을 심판한테 뭐라고 말하는 게 보인다.
“아이 씨발~ 내 안 할라요, 더럽게 심판 보네! 씨발놈들아! 너그끼리 다 해묵어라.”
차돌이는 테니스 라켓을 심판진에 던져 버린다.
차돌이를 말리려 온 코치는 차돌이를 안고 나가려는데 차돌이가 코치진을 잡아서 엎어치기를 해버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