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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의 투혼

(24) 볕 드는 쪽에 머무른 향기

by 블라썸도윤

비가 오면 땅속이 축축해서

숨을 쉬기가 힘든가 보다

밖으로 무조건 기어 나와야 해


뚫고 나오냐고 힘이 소진됐을까

눈이 없어 보이지 않아서일까


해는 쨍쨍 쬐고

맨살 투혼이라


혼자서 지지고 볶는데

이미 화상을 입었는가

붉은 살 감출 것을 찾지 못해


운 좋은 날

청년의 메모지는 들 것이 되어

비둘기 떼 노려보지 못하는

향나무 아래 흙으로 놓아졌다


밟히지 않으면 다행

이글대는 태양에 타지 않으면 다행


살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나

바깥세상은 만만치 않다





비가 억수로 왔다 싶더니 통통한 지렁이들 쌔고 쌨다. 발에 밟힐까 조심스러울 정도로 길가는 벌거숭이 지렁이가 군집을 이룬다. 지나기던 청년이 메모지를 꺼내 지렁이를 들어 나무 위에서 놓아준다. 햇빛 가리기 좋으라고, 비둘기 놈들 우르르 덤비지 말라고. 살자고 버티고 나온 길인데 주위의 협조가 없으면 힘든 게 우리네 삶과 같지 않을까. 시기하고 비협조적이고 부정적인 사람들과 업무를 같이 본다면 이건 악랄이다. 가정도 사회도 같이 도움 주고 살면 스마일 스마일 웃고 살 수 있다.


그제 지인은 힘이 없다며 한참을 길바닥에 앉아 있었다. 요깃거리를 챙겨주고 병원이라도 데리고 가볼 걸 그랬다. 며칠 전처럼 밥을 사주고 말을 더 건네볼 걸 그랬다. 그는 집 한 채랑 폐차 지경에 이른 소형자가용 한 대가 전 재산이다. 가지고 있는 것을 처분하고 나라의 용돈을 받아 보라고 권했는데 아낄 것을 아껴야지. 아사로 세상과 작별했다. 옆에서 권해줄 때 비빌 언덕으로 보고 고집을 피우지 않았더라면. 있는 것을 움켜잡고 있다가 세상 허망하게 간 지인은 지렁이의 투혼과 어떤 차이가 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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