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나 옷 좀 사야 하는데.” “그래. 남대문이나 동대문 도매상에 가봐. 거긴 옷이 많아.” “그럼 둘째 이모랑 수진이도 같이 가야지.” 캄캄한 저녁때쯤 티셔츠 하나를 사들고 내 큰 딸인 나해가 들어왔다. “엄마, 둘째 이모도 티셔츠 하나 사주고 밥도 같이 먹었는데 잔돈이 남아서 수진이 줬어.” “그래. 잘했구나.” 내 아이들도 계산은 으레 우리가 하는 걸로 알고 그렇게 생활화하면서 사촌지간에 우애 있게 지냈다.
호의가 계속되면 권위가 된다나. 수시로 둘째는 사람들 앞에서 “친정 도움도 없이 나는 애 셋을 혼자 키웠어.” 일러바치듯이 이렇게 씨불였다. “우리 애들 몇 천만 원 줘봤냐. 생색들 내지 마.” 누가 뭐라 하지 않았는데도 선수 쳐서 속을 쑤셔놨다. 약이 오르고 괘씸했다.
사장 자리인 둘째 책상에 올려놔 주라고 달력 종이 뒷면에 매직으로 써서 남동생 편에 보냈다. “뭐, 신세 진 게 없다고? 생색내지 말라고? 친정에서 물심양면 얼마나 많은 것을 가져가고 그런 말이 나와. 나도 푼돈이지만 꽤 해준 거야. 아, 이런 말을 자주 하다니 사람이냐!” 요것이 내 아이들에게로 화를 밀었다.
둘째네 유진이와 수진이가 할머니 댁으로 명절 인사를 왔다. 벼르고 왔더라. 신발을 벗어던지기 무섭게 얼굴에 밀가루를 묻혀가며 전을 부치던 수능 마친 나해한테 “네가 뭔데, 공부만 잘하면 다야? 너네가 우리를 깔봤지? 엉?” 팔까지 걷어붙이며 둘이서 멀미를 주더라. 어른이라고 다들 중간에서 개입도 안 하고 나해는 말없이 전을 부쳤다. 나도 아무 소리를 못 했다. 지어미를 힐긋 쳐다보고는 찍소리 없이 전만 부친 내 아이가 묵묵히 있어서 다행이었던가. 안 그럼 한바탕 난리가 났을 건가. 여기서부터 사촌지간 금이 갔다. 아직까지도. 이때부터 왕래의 끝이 된 거다.
내게 바보 같은 동정이 남아서 유진이 결혼할 때도 큰 도움 요청을 받아들였다. 이 조카의 대학 입학금을 대준 막냇동생은 입학한 지 두 달 만에 자퇴를 했다고 살림을 내는데 보태주지 않았다. 막냇동생이 두고두고 가슴 아파하길래 “유진아, 막내 이모 티셔츠라도 하나 사다 줘라. 고마운 마음을 꼭 갖고서.” 그랬더니 백가방 오십만 원짜리를 사 와서 막냇동생은 엄청 화를 냈다. “돈을 아껴 써야지. 누가 이렇게 큰 거 해 오랬냐.”라고 핀잔을 준거다. “아씨, 그럼 큰 이모 가져. 사다 줘도 그러네.” “난 이런 거 쓸 기회가 없어. 되도록 막내 이모 도로 주라. 그래도 사양하면 네가 그냥 갖다 쓰던가.” 난 폐 끼치는 걸 원치 않았다. 거기다 이건 막냇동생 것이 아닌가. 오십만 원이라길래 내가 물어주고 가방도 유진이가 가져간 게 됐다.
하, 후! 엄마는 막내가 조카 결혼 자금을 내놓지 않는다며 “애 친구는 이모를 잘 만나서 일본 유학도 가고 이모를 아주 잘 뒀어.” 여러 번 꽤 오래 말씀하셨다. 유진이 친구는 이모가 일본에 사니 그쪽으로 유학을 가서 학비를 벌어가며 생활했던 것인데. 그 친구를 직접 보게 됐을 때 내가 확인한 것이잖아. 우리는 이모 노릇을 두둑이 해냈는데, 가정이 있는 나는 못 쓰고 못 먹고 줄여서 형편을 넘어서까지 베풀어 준 건데 엄마는 안 해도 될 말들을 하셨다. 조카들은 미안함과 고마움도 모르면서 으레 받기만 하니 핏줄이니까 당연하게 다 받아들인 것 같았다.
큰 조카 유진이는 ‘내 가방’의 별명이 됐고 그 밑의 동생 수진이는 ‘수금녀’ 별명을 붙여주게 됐다. 대학 다니면서 신포동 닭강정 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수진인 빈손으로 다니지 말라는 큰 이모 말을 듣고 할머니 집에 한 달에 두세 번 오게 될 때 닭강정이라도 사들고 왔다. 엄마랑 통화할 때 “수진이가 왔는데 두통이 심하단다.” 버스 중간에서 내려 두통약 두 갑을 사고 엄마 집에 들러서 신포동에서 들고 온 가방에 5만 원 내지는 7만 원씩을 넣어줬다. 단 한 번도 내게 먼저 “이모가 용돈 준거 확인했어. 잘 쓸 게.”의 전화를 안 하더라. 내 돈을 수금해 가는 느낌이었다. 내가 수진이에게 전화해서 “돈 네 가방에 넣었어.” 하고 말하면 그제야 “고맙다.”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 가방’ 유진이는 화장품 회사의 매니저가 됐는데 내게 화장품 샘플은커녕 버려지는 샘플 뚜껑도 주지 않았다. ‘수금녀’ 수진이는 별명대로 은행에 취업을 했다. 막냇동생이 서운함을 가지듯 나도 얄미움이 쳐 올랐다.
둘째 동생이 “우리 자식한테 뭘 그렇게 해줬어? 내 새끼들 준 거는 난 못 봐서 몰라.” 이런 문자를 내게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도 나는 꾹 참았다.
곧 초등학교 입학할 늦둥이 조카 재현이는 할머니네 수화기를 들고 서 “예, 만강입니다.” 중국집 흉내를 잘 내서 웃음보를 줬는데도 도통 한글을 알려고 하지 않아서 속셈학원을 보내게 됐다. 내가 오지랖이 넓은 건지 얘네 엄마가 학교 가면 글을 다 깨우친다며 자기 아이한테 무관심을 하니 조카들 걱정을 내가 끌어안게 됐다.
내 의무처럼 피아노 학원도 보내줬건만, 전국 어디든 피아노 기본 수강료는 그때 당시 7만 원인데 엄마는 “여기가 못 가르쳐서 애가 잘 안 다니고 6개월 만에 땡 쳤다.”라고 하셨다. 그리고 재현이가 1학년에 들어가니 “남들 다 태권도 다니는데 얘만 안 다닌다.” 나를 볼 적마다 바람 하셨다. 난 모른 척했다. 결국은 재현이의 매형이, 본인 친구가 운영하는 합기도 학원에 넣어주더라. 한 달은 강습비가 무료라면서 치수가 큰 도복을 아이한테 입혀 보냈다. 가방 내던지면 기럭지가 긴 도복을 입고 온 동네를 비집고 다니더니 한 달 만에 애는 이걸 또 때려치웠다. 이래서 이 집 막내아들은 벽을 타고 긁어 매고 다니는 동네 꼬마 ‘땅개’로 별명 지어졌다.
둘째네한테 끝이 없는 지원을 해주게 된 것이 별명까지 덤으로 얹혀 주게 됐다.
누구든지 할머니 집에 와서 챙겨 갈 것만 노리지 말고 내 엄마 드시게 요구르트라도 사다 드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