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또박또박
필사를 하고 있다. 기왕에 있던 라미 만년필 한 자루에 서랍 깊숙이 처박아두었던 파란색 잉크를 채웠다. 파란색 잉크 옆에는 검은색, 빨간색 잉크도 있었다. 30대 즈음 회사 다닐 때, 폼 잡느라 만년필을 사용하던 흔적이다. 제목과 부제목, 본문의 색을 달리하기 위해 라미 만년필 두 자루를 더 사서 검은색, 빨간색 잉크를 채워 넣었다.
마아가린 한 숟갈을 떠서 따뜻한 밥 위에 얹고, 간장 조금을 섞어 숟가락의 등으로 '슥'하고 밀면 부드럽게 밀리는 것처럼 써지는 볼펜은 쓰는 맛도 없고 제대로 제어하지 않으면 꼬부랑글씨가 되고 만다. 사각사각, 서걱서걱 써지는 연필도 좋지만, 종이 위에 펼쳐진 흑연은 시간이 지나면 뭉그러지고 만다.
삼각형의 쇠기둥이 굳건히 종이 위를 찍어 누르고, 의지를 갖고 움직여야 비로소 제대로 된 길을 찾아 잉크가 번지는 만년필이 필사에는 제격이다. 겉멋이 들어 만년필을 사용한 적이 있다고 했지만, 사실 글씨 쓰기의 맛을 느끼려 한다면 단연 만년필이 최고가 아닐까 한다.
필사를 하다 보면 불만이 쌓여간다. 잉크가 지나간 앞장의 글씨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을 비우고 쓰리라 마음을 먹었지만 앞장의 글씨 모양이 자꾸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긴다. 따라 쓰는 책의 인쇄된 글씨는 가로세로 '반듯반듯'한데 앞장의 내 글씨는 '뾰족뾰족'하다. 뾰족한 글씨를 보노라니 뾰족한 내 성품을 닮은 것 같아서, 마치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기분이다.
나도 반듯하게 글씨를 쓰고 싶다. 그래서 '미꽃체 손글씨 쓰기'라는 책을 샀다. 글씨를 인쇄체처럼 반듯하게 쓸 수 있도록 연습하는 책이다. 기대감에 들떠서 앞부분의 설명을 휘리릭 읽고, 만년필을 들고 연습 부분을 따라 썼다. 5장째 쓰다가 책을 덮었다.
'평생을 두고 굳어진 글씨체를 바꾸려 하다니?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반듯하게 쓰려고 하니 속도가 느려터졌다. 똑바로 쓰려고 하니 불편하다. '잘 살다가 이제와 무슨 글씨체를 바꾸나?' 하고 생각하다가도 반듯한 글씨를 보면 부러워죽겠다.
보통의 날보다 세차를 여러 대하는 날이 있다. 세차하기가 힘들고 오래 걸리는 SUV 차량만 몰린 날도 있다. 그런 날 저녁에 필사를 하면 손가락과 팔뚝이 떨린다. 글씨는 파격적으로 뾰족해진다. 스스로를 대범하고 침착한 성격이라고 여겨왔지만 글씨체만 보면 나는 조급하고, 삐뚤어졌으며, 뾰족하다.
내 글씨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나만의 생각인가 싶어서 아내에게 한 장 가득 필사한 종이를 보여주고 물었더니, 읽기에 불편하다고 한다. 읽고 싶지 않다고 한다. '둥글둥글' 귀여운 글씨체를 가진 집사람은 뾰족한 내 글씨를 읽기가 어려운가 보다.
얼마 전, 보았던 글씨체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와 매국노의 글씨체를 비교한 내용이 떠올랐다. 기이하게도 독립운동가들의 글씨체는 사각형 안에 딱 들어맞았고 강직하게 꾹꾹 눌러썼고, 매국노(이완용)의 글씨체는 사각형을 벗어난 획이 많고, 갖가지 멋을 부려 놓은 공통점이 있었다. 글씨체만 보면 나는 매국노였다.
공들여 천천히 쓰면 반듯하다. 강직하게 멋 부리지 않고 쓰면 독립운동가의 글씨가 된다. 맥없이 손가락으로만 쓰거나, 갖가지 멋을 부려 쓰면 매국노의 글씨가 된다.
인생도 힘들여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하다 보면 성공한다. 맥없이 넋 놓고 살다 보면 세월의 복수가 시작된다. 나의 일도 힘들여 천천히 세차를 하면 고객은 만족한다. 맥없이 타성에 젖어 기계적으로 세차하면, 고객은 기가 막히게 알아채고 떠나간다.
그러니 천천히 반듯하게 글씨를 쓰려고 다시 만년필을 잡아야겠다.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천천히 또박또박 쓴 글이 읽기에도 좋고, 읽으면 강직한 마음이 들어 든든한 마음이 든다.
천천히 또박또박 쓰지 못하고 뾰족하게 쓰고 있다면, 내 의지대로 펜촉이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그때의 나는 손이 아프거나, 팔이 아프거나, 마음이 아픈 거다. 그러니 관두는 게 아니라 치료하고 다시 써야 한다.
사실 천천히 쓰나 빠르게 쓰나 시간은 별 차이가 없다. 느껴지는 마음이 더 크다. 천천히 쓰느라 허비된 시간은 쓸데없는 잡생각이나 의미 없는 시간을 가져다 쓰면 된다.
세차도 천천히 해야겠다. 꼼꼼히 타월이 지나온 자리가 깨끗해졌는지 살피며 해야겠다. 다시 살펴 덜 닦인 부분을 다시 닦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겠다.
다시 고칠 기회가 그리 많지 않은 인생에서, 내 손끝으로 달라질 수 있는 것 중에 글씨체와 세차가 있다.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천천히 또박또박 쓰고, 꼼꼼하고 깔끔하게 세차)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