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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니운랑 May 24. 2024

드라마에서만 있는 일 아냐?

엄마부대가 간다

3/04 고등학교 입학식

3/20 중학교 공개수업, 학부모총회

3/21 중학교 담임선생님 상담

3/26 고등학교 공개수업, 학부모총회, 담임선생님 상담

4/12 고등학교 학부모 진학설명회

......

3월은 엄마들에게 어느 달보다 바쁜달이다.

     

매해 학기 초가 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첫째 아이가 8살이 되던 해. 우리 가족은 아이가 다닐 초등학교 근처로 이사를 왔다.

"언니~ 저희 집에 집주인이 들어오신데요. 제가 가진 돈으로 인근 지역 초등학교 근처로 갈 수 있는 집이 있는지 알아봐주세요." 

그 당시 평소 친하게 지내던 부동산 사장 언니에게 나는 가게문을 열면서 소리쳤다. 이것이 이사 갈 집을 구하는 나의 첫 번째 조건이었고 그 덕에 우리 집은 창문만 열면 초등학교 운동장이 보였다.

      

기존에 살던 곳이랑 멀지는 않은 곳이었지만 이사를 오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아이는 3월에 집 앞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엄마도 아이도 주변에 친구가 없었기에 학기 초 엄마들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부산 사투리를 사용하고 낯을 가리는 비교적 젊은 엄마였던 나는 처음부터 그 모임에 끼이지 못했다. 게다가 대단지 아파트 옆의 소규모 아파트에 살고 있단 사실이 스스로도 자격지심이 생겨 더 그 모임에 쉽게 동화되지 못했다. 

‘OO에서 봐요. XXX놀이터에서 만나요.’ 

도대체 OO와 XXX가 어디인건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대부분이 그 동네 유치원을 다닌 터라 그 곳이 어딘지 모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초등학교 첫 공개수업과 학부모총회가 있는 날의 인근 미용실은 이미 일치감치 예약이 마감되었다. 공개수업시간이 가까워지면 질수록 삐까번쩍하게 차려입고 우르르 교문을 통과하시는 엄빠 부대는 정말 주변을 압도할만한 진풍경이었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뿐 아니라 인근 초등학교는 다 같은 날에 학부모총회가 있어서 그날은 밖에 나가면 사람들의 옷차림이 꼭 무슨 엄청난 중요한 일이 있는 날인 것만 같았다.

    

아이의 반을 찾아 교실에 들어서니 과밀학급임에도 불구하고 엄빠(엄마나 아빠)가 오지 않은 학생은 단 한명도 없었다. 몇 몇 반에서는 이미 존재의 두각을 들어내어 엄마들 사이에서 별명이 붙은 분들도 생겨났다. 걸어서 10여분도 걸리지 않는 아파트에서 학교로 람보르기니를 몰고와서 학교 운동장에 주차를 해두신 '람보르기니', 나이가 많고 씀씀이가 남다르신 '왕큰손언니', 해마다 아이 생일날 친구들을 가평 별장에 초대해서 파티를 열어주는 것으로 유명한 '그별장엄마' 등을 필두로 그 아래 소소한 별명을 가진 엄마들이었다.

    

사실 학부모총회 전 입학식을 하던 날, 이미 반 카톡이 열렸고 초대를 받았다. 카톡 속에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오갔고 그 중에는 개인 생일잔치는 잘못하면 아이들의 마음이 상할 수도 있으니 분기별로 생일자를 모아 생일잔치를 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1인당 회비는 1년에 10만원이고 생일선물은 5000원 이하로 각각 준비하잖다. 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교 후 놀이터에서는 자연스레 반모임이 열렸다. 일주일에 한 번 인근 어린이 축구교실에 가는 축구반모임, 격주 1회 자연과 함께하는 유행처럼 번진 숲 체험 반모임 등 여러 모임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4월이 되어 첫 생일잔치날이 되었다. 인근 태권도장에서 레크레이션과 함께 출장뷔페가 준비되어있고 생일자 6명은 나머지 24명의 아이들에게 각각의 선물을 받아 24개의 선물을 보따리에 한아름 넣어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5000원 이하의 선물도 비교가 되는것 같아 약간의 심적부담으로 다가왔다. 두 번째 생일잔치는 여름이라 어린이수영장에서 수영선생님들의 레크레이션과 캐릭턱 도시락 점심이 제공되었고 세 번째 생일잔치는 가게 파티룸을 빌려 전문 레크레이션 마법사님을 불러 반 아이들이 함께 즐기며 식사를 했으며 네 번째 생일잔치는 솔직히 이젠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아이들이 학교를 간 오전시간에는 엄마들의 반모임이 가끔 있었다. 직장맘들을 위한 첫 저녁반모임에는 대부분의 엄마들이 참여했고 1차, 2차, 3차 끝에 새벽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반모임에는 학교 내에서도 유명한 별명이 붙은 분이 있었는데, 어떤 날은 인근 호텔로 커피를 마시러 가자고 했고 다른 날은 호텔 시그니처 딸기 뷔페를 즐겼다. 여름방학때는 아이들을 데리고 괌에 가서 아이들은 어학연수, 엄마들은 골프를 치러 다니자고도 했고 가을에는 관광버스를 대절해서 1박2일 여행을 가자고 자신이 반아이들 경비를 다 내겠다고 했다. 그 말에 자기가 뭔데 아이들 경비를 내냐고 여기 그런 돈 없는 사람도 있냐고 빈정상해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이런 일은 드라마에서만 있는 일인 줄 알았다. 

    

나는 결국 적응을 하지 못하고 그 모임에서 튕겨져 나왔다. 

'내가 지방출신이라 모르는 거야? 강남이나 대치동도 아닌데... 그런 곳은 여기보다 더 한 것 아니야?' 

이전 동네에서 내가 이 곳으로 이사를 간다니까 인근에서 제일 핫한 학교라고 걱정을 해주신 분들이 계셨다. 거긴 남자 학군인데 여자 아이 엄마가 왜 그 곳으로 이사를 가냐고도 하셨다. 이제는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나도 안다. 

    

2년 뒤, 둘째 아이를 입학시키며 첫째 아이 때와 분위기가 같을까봐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70년대 엄마들의 문화에서 80년대 엄마들의 문화로 상황이 바뀌었고 유명했던 세력들도 인근 더 좋은 새아파트 혹은 강남으로 이사를 갔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그리고 나도 익숙해져서 첫째 아이 때만큼의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이 또한 재미있는 추억이다.   


나 때도 치맛바람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 당시 국민학교를 입학하고 학교에서 말 한마디 하지 못하던 나를 위해 엄마는 부지런히 학교를 드나드셨고 그 덕에 나는 학급임원을 몇 번이나 할 수 있었다. 그런 사실을 그때의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엄마의 노력이 숨어있었다는 사실을 나도 내 아이를 입학시키고서야 새롭게 알게 되었다. 


나는 현재 초등학교에서 강사로 일한다. 지금도 학부모총회와 첫 공개수업 때는 학교가 시끌벅적 들썩인다. 엄마도, 선생님도, 아이들도, 학교도 초비상인 것이다. 


세월이 흘러 학생 수도 점점 줄고 있고 부모님들의 학교 참여의 모습도 조금씩 변화되고 있다. 하지만 자식을 낳고 엄마가 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엄마부대가 완전히 사라지는 날은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을 날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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