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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은 열매가 되지 못한 그리움

내 뒤엔 항상 네가 서 있었다-11

by 진아

작년가을은 지나가고 새로운 가을이 오고 있다. 키가 쑤욱 자란 나무는 볕과 바람을 품은 채 그림같이 서 있다. 뜨거운 계절을 견딘 초록 숲은 더 깊어졌다.


여기, 셀 수 없는 계절을 잇는 사람이 있다. 화가는 여러 색으로 풍경을 채색하고 쓰는 사람은 단 한 가지 색으로 세상을 채워간다.


올해 여름도 무사히 견딘 우리는 얼마나 단단해졌을까.


차곡차곡 쌓인 그리움은 꽃이 되어 '백일홍'(왼쪽), 나비가 동창회에 모인다면 이런 모습일까 '수국'(오른쪽)



푸른 봄


아직은 여름

지나간 적 없는 푸른 봄


눈앞에 바다를 두고도

깊이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마주 앉아도

가늠할 길 없는 당신의 시간


서로를 마주해도

외로운 당신은

차마 읽지 못한 시집


전하지 못한 그리움은

책갈피에 끼워두고

애타는 마음

책귀퉁이에 접어둔다




꽃봉오리였던 아이보리장미가 며칠 사이 피었다. 탐스럽게 피어날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초라하게 피다 말았다. 활짝 핀 꽃이 아름답다는 건 착각일지 모른다. 어떤 모습으로 피어날지 모를 때, 꿈과 기대로 가득 차 있을 때, 꽃 피기 전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일지도 모른다.


작년 불꽃일까 올해 불빛일까 '꽃무릇'(왼쪽), 가을수련회에 참석한 '수련' 삼총사(오른쪽)


꽃무릇


작년 불꽃은 졌는데

언제 다시 피어올랐나


돌고 돌아 돌아오는 계절 따라

아무렇지 않게 피어났나


지난 잿더미 식지도 않았는데

잊지도 않고 살아난 불꽃


파릇한 줄기 위

일렁이는 불빛은


어둠과 뜨거움마저 삼키며

긴긴밤 어떻게 견뎌냈을까


맺지 못한 시간에

다가가지도 못하면서

물러서지도 못하면서

멈추길 기다리


기다림은

열매가 되지 못한

그리움인지도 모르고




쓰는 세계는 차가운 여름바다. 위험할걸 알지만 뛰어들 수밖에 없다. 텅 빈해변을 맨발로 걷는다. 발에 닿는 모래는 친구가 되었다가 시가 되었다가 삶이 된다. 거대한 파도에 얼마나 흔들려야 고요해질까.

내려놓지 못한 마음은 바다 한가운데 머문다. 이대로 글이 되고 하나의 언어가 된다면 그대로 뛰어들어도 좋을 텐데. 바다에 몸을 뉘이고 숨죽여 흘러도 그저 좋을 텐데.



발끝을 들어 자주 하늘을 올려다본다. 세상은 얼마나 넓고 우주의 이름 모를 행성은 얼마나 눈이 부신지. 가슴에 종일 볕이 든 날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아도 잠이 찾아온다. 애써 담지 않아도 뭉툭하고 좁은 그릇만 매만져도 꿈을 꾼다. 꿈꾸지 않고 잠든 밤에는 시가 이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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