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 12:03

해피 30!

by 한운후

- 중편소설, <해피 30!>


- 장르: 도시 판타지 (Urban fantasy)


- 기획의도: 경악스러운 일들이 눈앞에 버젓이 벌어져도 쉬쉬하며 애써 고갤 돌릴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의 무관심, 서른이라는 나이를 인식한 우리의 마음에 무엇이 벽을 두르도록 만들었는지.


- Gist: 30살 생일을 맞은 어린이집 교사에게 하루동안 벌어지는 신비롭고 잔혹한 일들에 대한 이야기/ 한 인물이 아침에 침실에서 눈을 떠, 밤에 다시 눈을 감기까지 겪는 대내외적 변화.


- 로그라인:

수많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임의로 증발하는 세상, 서른 살이 넘은 누구든 매일 밤 꿈에서 핏물에 흠뻑 젖은 증발자들을 마주해야만 한다. 서른 번째 생일 파티를 맞이하기 위해 고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어린이집 교사 아희, 수 백개의 금색 방울이 든 가방을 들고서 한쪽 다리를 절뚝이는 한 젊은 남자를 만난다. 의문스러운 남자가 땅을 점점 세게 디딜 때마다, 방울은 더 크게 울고,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말로만 들어왔던 그 꿈을 현실로써 마주한다.


- 주요 등장인물


아희:

어린이집에 출근하기 시작한 지 2주가 되어간다. 유복한 가정에서 큰 걱정 없이 살아왔고, 이제 막 서른이라는 나이가 되었다는 느낌이 여전히 낯설지만 곧 스스로에게 일어날 변화들을 직면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민영:

이곳저곳을 전전하다 자신만의 공간을 얻기까지 조여사의 도움으로 어렵게 주거문제를 해결해 온 어린이집 교사. 불평, 불만 없이 쓰레기 처리 같은 모든 자잘하고 궂은일을 도맡아서 한다. 얼마 전 어린이집 낮잠 시간에 직접 품에 안고 있던 한 어린아이가 증발해 버리는 불미스러운 일을 겪었고, 그 후로 증발자들은 결코 죽은 게 아니라 맹신한다. 공교롭게도 자신이 증발하는 순간이 닥칠 때까지 '우리는 모두 한 곳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라는 신념을 잃지 않는다.


조여사:

아희의 부모와 교회를 통해 오래도록 연을 이어온 어린이집의 원장. 어린이집의 아이들을 포함한 모두가 언제나 자신 앞에서 긴장해 있기를 바라듯 행동하고, 자신이 괜찮으면 모두가 괜찮을 거라 의심치 않는 당돌한 성격의 여인.


무현:

아희가 잠시 정신을 잃었을 때 자신의 외투를 덮어주고, 의식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린 남자. 한쪽 다리를 다친 듯 절뚝거린다. 어째서 가방을 수 백 개의 작은 금색 방울들로 채웠는지 묻는 아희를 의문스럽게 회피하다가 열차 안에서 몸소 증발하며 바닥에 가방을 떨어트리는 것으로 그 이유를 대신 설명한다.








Prologue


수 십여 년 전부터 범지구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사라져 갔다.
특별한 이유나 조건에 상관없는 '임의 증발'로 실종하는 인구는 대략적으로 하루에 60-80만여 명. 그들과 인연이 있고, 태어난 후 30번의 생일이 지난 3억 5천만 명은 매일 원치 않는 꿈을 다함께 마주하는 공몽(共夢)현상, 즉 *코솜니아라 불리는 특이 현상을 겪어왔다.


*코솜니아(Cosomnia):
'함께', 또는 '공통된'을 의미하는 접두사 'Co-' + '꿈'을 의미하는 라틴어 Somnium에서 유래한 somnia
'공통된 꿈', '함께 꾸는 꿈'이란 뜻으로 같은 날 잠에 든 사람들이 공통된 환영을 접하는 정신 현상.




AM 12:03


아희가 그의 손을 잡아당겼고, 그들은 함께 달렸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노란 태양, 잔디, 친구들, 활기 넘치게 뛰노는 강아지들이 있었다. 그녀는 강렬한 휘파람 소리에 고갤 들었고, 거대한 호를 그리며 허공을 가르던 주황색 부메랑이 갑자기 온 방향으로 광채를 튀기며 여러 조각들로 폭발하는 걸 볼 수 있었다. 반짝이는 공기가 짙은 멜론 향기로 변해가는 와중에, 크기가 각기 다른 파편들은 수 십 마리의 새가 되어 있었다. 활공하는 무리가 둥글게 방향을 돌려 무지개처럼 굽은 나무줄기 아래로 아무런 소리도 없이, 전속력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달리길 멈추고 잔디를 내려보았다. 꼼지락대는 발가락 사이로 삐져나온 잎들은 마치 커다란 동물의 털처럼 보드라웠다. 그의 손을 잠시 놓고, 자세를 낮춰 그 털에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닿은 순간 윤기가 흐르는 녹색 잔디는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부르르 요동치기 시작했다. 커다랗게 들썩였고, 곧바로 땅이 밑으로 훅 꺼져버렸다. 두 발아래에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 머리 꼭대기까지 흘러간 순간, 그녀는 다리를 쭉 뻗은 채 한동안 떠 있었다. 허공 어딘가를 떠다니며 여전히 한 무리를 이루던 친구들은 손을 흔들어 보였고, 모두의 표정은 일말 근심조차 없어 보였다. 눈 아래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에 얼굴이 반쯤 가려진 남자 역시 땅으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그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마음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AM 07:10


모든 게 멈춰진 듯 고요했다. 가슴을 채운 찬 공기가 잠기운을 몰아냈다. 점점 앞이 또렷하게 보일수록 흐려지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아희는 눈을 감은 채 모래를 움켜쥐려는 의지로 그 꿈을 더듬었지만, 격렬히 뒤흔들린 퍼즐 상자처럼 기억은 조각난 실마리와 혼돈뿐이었다. 제대로 끝맺어지지 않은 이야기, 혹은 그저 순진한 착각일 수 있었다. 그녀는 침대 옆 협탁에 놓인 공책으로 손을 뻗었다. 선 하나 없는 하얀 공간으로 가득한 공책 한 장을 잡고서 뒤의 나머지 수 십장을 내려보면 속에서 검은 구름처럼 걱정들이 피어올랐다. 흰 베개를 아래 깔고, 그 위에 공책을 올렸다. 잠결에 만났던 몇 안 되는 인상들이 녹다 남은 설탕처럼 머릿속에 남아있었지만, 그녀의 가족들이 읽는 건 조금 더 간결해야 했다. 누구든 납득할 맥락이 담겨있어야만 했다. 완성 끝에 탄성을 불러일으키는 블록 장난감의 어설픈 설명서를 그리듯 아희는 펜 끝을 힘주어 눌렀다.

불 꺼진 거실의 커다란 창문 밖으로 밝고 두꺼운 안개가 가득했다. 아희는 노트를 탁자에 올려두고 소파에 앉았다. 흰 안갯속의 빌딩숲 사이로 드러난 필통 모양의 건물들은 움직임이 굼뜬 도시의 혼령처럼 보였다. 더 멀리에 뭐가 있었는지 떠올렸다. 철골 타워, 8차선 고가도로, 그리고 그 위에서 먹이를 찾으러 굴러가는 딱정벌레 같은 차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몸이 꺼질 듯이 소파 쿠션 사이로 깊이 파고들었다. 죽어갈 걸 알면서도 끊임이 없이 파르르 떠는 녹색의 뭔가가 살을 간지럽히는 느낌이었다. 이토록 밝고 아늑한 자리는 평생도 충분하지 못할 것 같았다.


엄마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방을 누볐다. 미역을 냄비 가득 채워 넣은 뒤, 냉장고로 향하던 길에 위로 밥그릇 하나 높이만큼 위로 떠오를 듯싶었다. 압력밥솥의 증기 속에서 그녀는 서둘러 가위와 하얀 소고기 힘줄들을 싱크대에 던졌고, 스테인리스 소쿠리에 남은 미역들을 투명한 플라스틱 비닐에 쏟아냈다. 비린 물로 흥건한 바닥엔 다진 마늘 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취사가 완료되었다는 밥솥의 안내음성이 20초 남짓 이어지는 동안, 아빠는 턱과 목을 만지작대며 뉴스 앵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그저 벽면의 뉴스에 고정한 듯했지만, 두 무릎은 바람 속 나뭇가지처럼 흔들고 있었다. 진공 포장이 완료된 짧은 전자음악이 울리자 부부는 서로와 눈을 맞추고, 미소를 나누었다.

아희는 종이를 식탁에 올렸다. 하도 만지작거리는 바람에 귀퉁이에 깻잎 같은 주름이 져있었다. 그녀가 이리저리 펜 끝이 가는 대로 맞추고 엮어본 어젯밤 꿈의 기억은 마치 남의 일기처럼 낯설었다. 수증기를 피우며 은은하게 끓어오르는 국이 고소하고 누릿한 향을 풍겼지만, 부모에게 딸의 마지막 유기적 꿈 이야기는 단연 허기보다 구미를 당기는 것이었다.

"읽어봐도 돼?"

아희는 고갤 끄덕이며 엄마에게 종이를 건넸다. 아빠는 금 조각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어깰 들썩이며 주방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세상에, 여보."

두 손으로 종이를 쥔 엄마의 얼굴이 환해졌다.

"잘했다, 아희야. 오늘 시간 되면 네 오빠 도착하기 전까지 액자로 맞춰 놓을게."

아빠는 마침내 아이같이 방긋 웃었다. 그는 나무 의자 등받이 위쪽을 손가락 뼈마디로 두 번 두드렸고, 입을 손으로 막고 눈물을 흘리는 아내를 끌어안았다. 마치 작고 새로운 가족 구성원이 탄생한 순간 같았다.

"여보, 당신도 기억나? 29살때 마지막으로 꿨던 꿈."

"그럼. 내 양쪽 복숭아 뼈에 날개가 돋았었지. 그게 왜 그리 좋았는지."

아빠가 빈 허공에 시선을 던졌다. 벌써 눈시울 붉어진 엄마는 코를 훌쩍이며 입술을 씰룩였다.

"해피 서른."

TV 아래에서 시간을 알리는 높고 얇은 음이 삐빅거렸다. 아희는 아빠가 잽싸게 달려 나가자 거실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가 알루미늄 선반에 놓인 접시 모양 알람의 청록색 버튼을 눌렀고, 바로 옆에 있던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서서히 커지는 선명한 뉴스 소리에 온 집안이 작은 오르골처럼 진동했다.

"트루 뉴스. 이상 한국의 전일 증발자 통계를 알려드립니다. 서울, 경기 728명. 강원 263명. 충청..."

매일 아침마다 펼쳐지는 상황이었다. 정면으로 카메라를 향한 아나운서들의 하얀 정수리의 다음엔 전국 날씨 지도 같은 장면이 나타났다. 삼면이 바다를 마주하는 사실적인 한반도 그래픽엔 각 도마다 백 단위의 빨간 숫자들이 적혀 있었고, 물결 같은 투명한 흐름이 위에서 아래로 전체 화면을 훑고 지나가면, 빨간 글자들은 세분화된 지역별로 나뉘어 더 작은 숫자들을 띄었다. 그리고 나면, 더 자세한 지역별 추이와 임의 증발자로 인해 벌어진 사고들이 간추려진 카드 뉴스로 이어졌다. 그 모든 과정에도 화면의 가장 위에 떠있는 빨간색 천 단위의 숫자는 뉴스가 끝날 때까지 변하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는 아침 뉴스가 시간이면 움츠러든 초식 동물이 되었다. 꼭 흔들대는 금빛 풀밭 한 지점을 엄중히 바라보며 암사자를 상상하는 가젤들처럼, 그들은 TV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아희는 괜히 주방조리대로 시선을 옮겼다. 걸핏하면 변검 공연처럼 얼굴이 바뀌는 가족 옆에 앉아있는 건 시간이 지나도 익숙지 않았다.

피아노 멜로디와 함께 뉴스가 막을 내렸고, 뒤이어 북유럽 침구류 광고의 낭랑한 소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코솜니아가 당신의 삶을 파괴하나요?"

오래전부터 라디오나 TV에서 줄기차게 보이곤 했던, 유명한 광고였다. 영상의 내용은 옛날부터 시대가 변함에 따라 조금씩 바뀌었지만, 붉은 벨벳 윗옷을 입은 금발의 소년이 호숫가나 숲, 또는 초록 들판을 거니는 장면만큼은 브랜드의 특색으로써 변함이 없었다. 아희는 특히나 초등학생 시절에 그 광고의 소년 역할을 맡았던 아역배우를 좋아했다.

"이렇게 하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당시 금발의 소년이 잠에 든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깡충거리고,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는 장면에 매료되어 엄마의 화장대 거울 앞에서 종종 따라 하기도 했다. 항상 백합을 손에 들고 있는 소년은 광고 시청자들의 안내자라도 되는 것처럼 카메라를 향해 밝은 얼굴로 당차게 노래를 부르곤 했는다. 재밌는 건 그가 풀밭 곳곳에 눈을 감고 누워있는 사람들을 곁에서 노래를 멈추지 않는 것이었다. 주위에 줄무늬 잠옷 차림의 수많은 사람들이 온 풀밭 위에 널브러진 채 잠들어 있어도 개의치 않았다. 탐스러운 태양 아래에서 꽃을 휘두르며 시 같은 노래를 퍼뜨리는 게 우선이었다. 백야의 나라가 자부하는 침대 광고였다. 소년의 노랠 들으며 다 같이 깊은 잠에 든 사람들의 모습에도 어떠한 평화로운 구석이 존재했다.

"어머, 국물 다 졸아들었겠다."

그녀의 엄마는 손등으로 눈 아래쪽을 톡톡 두드리며 주방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냄비 뚜껑을 열었다.

"송이도 넣었어, 국물 맛있을 거야."

"잘 먹을게요."

아희가 두 손으로 국그릇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조리대 위에 덩그러니 놓인 진공 미역 팩에 눈이 갔다. 채석장의 원석처럼 겉이 울퉁불퉁한 검은색 덩어리였다. 굵은 줄기들은 바싹 쪼그라든 상태였고, 어느 것 하나 원래의 모양을 그대로 갖고 있지 않았다. 공기뿐만이 아니라, 마지막 1초까지 빼앗겨버린 모습이었다.

"세상에, 내 정신 좀 봐."

엄마는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물기 하나 없는 두 손을 치마에 닦는 척하더니, 진공 미역 팩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허둥지둥 냉장고 빈자리에 팩을 구겨 넣는 와중 벽면에 하얗게 낀 성에가 충격을 받고서 부서진 뼛조각처럼 떨어져 나갔다. 두 걸음을 물러나 이를 꽉 물고, 온몸의 무게를 실어 다시 밀어붙였다. 북극곰 같은 냉장고가 뒤로 기우뚱하더니 쾅 소리를 내며 앞으로 쏠렸다. 내년에나 열릴 수 있을 옷장처럼 잠겨버렸다.

모두가 의자에 앉았다. 쇠숟가락이 그릇을 스치자 팅 하는 맑은 소리가 울렸다. 노란 국물 위를 떠다니던 연두색 기름방울들이 숟가락에 의해 흩어지고, 다시 한 곳에 모여들었다. 아희는 삶에서 가장 젊은 날을 축복하는 한 숟가락을 입에 집어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