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세스 바리>를 읽고
세상에는 수많은 바리들이 존재한다. 원하지 않은 임신으로 축복받지 못하고 버려지는 아이들, 가난한 현실 때문에 버려지는 아이들, 부모의 방임으로 인해 관심 밖으로 버려지는 아이들. 이렇듯 어른들의 무책임함과 이기심으로 인해 깊이 패인 영혼들의 상처가,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 고스란히 얼룩으로 남아 있다.
이렇게 얼룩진 인생의 무대는 이 소설 안에서 등장하는 ‘그들의 방’과 그 맥락이 유사하다. 버림받은 이들의 한이 살아있는 방. 집에서 두 발 자국만 나아가면 닿을 수 있는 철길로 인해 아슬아슬하게 죽음의 문턱에 매달려있는 것 같은 그들의 공간.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들이 겹겹이 쌓여 등장인물들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듯 보여주는 협소한 장소. 그래서 쉽게 꺼질 것 같지만 작게나마 살아 숨 쉬고 있는 그들의 삶들이 방 안에 녹아들어 있어, 책장을 쉬이 넘기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한 번 읽고 책장을 덮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이 책을 놓기가 아쉬워, 읽고 또 읽었다.
이 소설의 첫 부분은 굴뚝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걸음을 멈춘다. 굴뚝을 본다. 걸어간다. 굴뚝이다. 걸어간다. 굴뚝을 올려다본다.’
굴뚝은 바리의 연인인 청하가 일했던 곳이며, 그가 화학약품공장의 관련자들에게 죽임을 당해 바리와 슬픈 이별을 할 수밖에 없던 곳을 상징한다. 친할머니인 청하사의 보살핌 덕분에 의젓한 청년으로 성장하여 바리와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꿈꿨던 청하는, '있잖아, 나는 두 번 버림받았어. 우리 아기를 낳으면 절대 버리지 말자.'라고 고백했던 바리의 말이 무색하게도, 그렇게 짧은 생을 마감한다. 가족에게 버림받았던 바리가 청하와 행복한 가정을 이루려고 하는 찰나에 바리는 또다시 혼자가 된다. 그녀는 태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친으로부터 ‘바리’라고 새겨진 겉저고리와 함께 산파의 품으로 버려졌고, 토끼가 바리의 친모를 만났을 때에도 돈 봉투와 함께 또다시 버려졌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맞지 않은 옷인 것처럼 계속 버려지고 혼자가 되는 그녀의 운명은, 그녀가 임신사실을 접했을 때 아이를 '버리지 않기로' 다짐하게 만든다. 작년 2월 임신소식을 접하면서 어떻게 키워야 올바른 사람으로 키울 수 있을지 그 고민부터 했던 나와 달리 그녀는 버리지 않는 것이 자신의 아이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그렇게 다짐한다. 가혹한 인생의 굴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현실을 감내해야 했던 그녀가 그리 생각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겠다,라는 생각이 드니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이렇게 버려지는 삶을 소재로 소설화 한 이 책 안에서는 여주인공 바리뿐만 아니라 나나진, 청하, 산파, 토끼, 연슬 등 모두의 세심한 속사정을 가감 없이 꺼내놓으며 확실한 개연성을 보여준다.
연탄공장 사장의 일곱째 딸로 태어났지만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버림받은 바리, 부친이 살인누명을 쓰고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 모친에게 버림받은 청하, 세훈 때문에 화얌과 영원히 이별하게 된 나나진, 유복한 가정에서 생활했지만 불임판정을 받고 남편에게 외면당해 결국 이혼을 선택했던 산파, 전우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는 대가로 돈을 챙긴 친부로 인해 희생양이 되어버린 토끼, 그리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옐로우하우스의 몸 파는 유리로 살아가지만 결국은 그 가족들에게조차 외면당해 외톨이가 되어버린 연슬까지.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삶의 가장 밑바닥에서 행복을 찾으려 애쓴다. 청하와 바리는 함께 가정을 이루고 싶어 했고, 산파와 토끼는 바리를 키우면서 아이를 낳지 못하는 자신들의 한을 풀어내고 싶어 했으며, 연슬은 혼자 남겨진 자신의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 했다. 이렇듯 그들이 원하는 건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소소한 행복이었다.
지금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당연한 것들이 저들에게는 간절한 것이었다. 가족이라는 구성원 안에서 따뜻한 정을 느끼며 사춘기를 보내고 미래를 꿈꾸는 모든 것들이, 세상의 모든 바리들에겐 간절한 소원이 된다. 제발 이 소설 안에서라도 상처받은 이들의 삶이 행복해지길 간절히 염원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의 행복은 이내 상실했고 산산이 부서졌다.
산파가 암 투병 끝에 자살을 결심하고 바리에게 독초 사용법을 알려준 것이, 바리의 불행에 한 발짝 더 다가서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산파가 바리에게 독초 사용법을 알려주며 자신의 자살을 위해 그 모든 과정을 그녀가 하도록 시키지 않았다면, 화학약품공장 회장의 죽음에 바리가 연관될 일도 없었을 것이고 청하의 죽음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며 바리와 청하는 남들처럼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을지도 모른다. 토끼가 청하의 죽음 이후 치매에 걸리면서 TV를 향해 외쳤던 말이 머릿속에서 계속 맴돈다.
“그런데 왜 하필 바리야. 이 못나고 독한 사람아. 왜 바리에게 시켰어? 나한테 하라 그러지. 내가 못 할 줄 알고?”
나도 토끼와 똑같은 말을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왜 하필 자살안내자 역할을 바리에게 시켰냐고, 당신은 정말 못됐다고, 당신은 너무 이기적이라고.
직접 자신의 목에 천남성 약초를 들이켜 고통을 느끼는 악몽을 꿀 정도로 손이 떨리고 목이 막히는 그런 두려운 일을 왜 하필 바리에게 시켰을까. 약초 사용법을 알려주는 대신, 학교에 가길 원했던 바리의 소원을 들어줬어야 했다. 산파가 자신의 삶을 마감하기 전에 부모와 바리의 연을 다시 이어줬어야 했다. 어차피 바리가 버려질 운명이었다면 불특정한 사람들에게 학대받고 성장하는 것보다는 애지중지 바르게 키울 수 있는 산파와 토끼에게 간 것이 옳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애초에 산파가 아이를 품고 싶은 욕망에 휩쓸려 바리의 친모에게 거짓말만 하지 않았더라면, 양심의 가책이 세월에 의해 닳고 닳아 없어지기 전에 친모와 바리의 연을 다시 이어줬더라면, 그녀의 어두운 운명을 조금이라도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들을 바랐던 바리의 친모와 아이를 원했던 산파의 욕심이 빚어낸 결과는, 책 안에서 생생하게 그려냈듯 안타깝고 어두운 바리의 운명이다. 밑바닥 인생에도 행복이 존재하는데, 이 소설 안에서는 바리에게 가혹한 운명만 그려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팠다. 마치 기찻길 반대편 동산의 흙이 그들의 집을 향해 끊임없이 흘러내려 철길과 맞닿도록 밀어내는 것처럼, 흘러내린 흙을 퍼내고 또 퍼내도 계속 바리의 발목에 달라붙는 것처럼, 그렇게 바리의 운명을 어둠으로 가득 채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너무 몰라서 혹은 너무 순수해서 그 운명을 피하는 방법 자체를 몰랐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로, 바리는 그 운명을 이용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지막을 함께 했다. 세 남자아이들의 장난으로 기차 쇠바퀴에 뭉개진 갈매기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산파가 키우는 약초밭으로 가 처음으로 죽음의 공간으로 영혼을 인도하던 그날처럼 말이다.
암 투병을 하다가 죽음을 택한 산파, 가족에게 외면당해 갈 곳 없던 연슬, 70년 세월 끝에 만난 진정한 연인의 죽음 이후 상실감에 젖어있던 청하사 할머니를 위해, 삶에 대한 의욕의 불덩어리가 차갑게 식어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렸던 그들의 마지막을 위해, 그들이 원했던 음식을 함께 먹고 곁을 지키며 자살을 도와줬던 바리.
그런 바리의 배려 덕분에 그들은 그 누구보다 저승으로 가는 길 내내 위로받았을 것 같다는 추측을 해본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눈을 감는 순간 행복했고 편안했다면, 바리는 그걸 통해서 역으로 위로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더욱 그들이 저승으로 가는 길목이 평안했길 바란다.
이렇듯 등장인물들을 둘러싼 시대적 정황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다 세밀하게 표현하는 이 소설은 많은 것을 내재하고 있었다.
기차 덕분에 최대의 호황을 누리다가 노선의 폐지 때문에 한순간에 몰락해 버렸고 이후 재개발의 붐이 또다시 일어나 예전의 호황이 수인곡물시장에 다시 찾아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심어주면서, ‘삶’ 또한 그와 같이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물결과 같다는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소설 안에서 그려진 바리의 삶은 결코 행복하다고 할 수 없지만, 작가는 책장 사이사이에 그녀도 결국 ‘변화하는 삶의 흐름’처럼 또 다른 행복을 위해 살아갈 것이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있었다. 계속 버림받았던 바리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 즉 ‘임신’을 매개로 하여 그녀의 아이를 통해 사랑을 주고받으며 그녀가 소소한 행복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도록, 계속 불행했던 그녀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작가는 마지막까지 배려하는 것을 잃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꼭 삶의 의미를 상실하여 빈껍데기만 남아 있는 것 같은 그들의 혼을 죽음으로써 위로해야 했을까. 죽음이 아니더라도 ‘삶의 의미’를 부여하여 또 다른 삶의 이유를 만들어주는 것은 어땠을까. 바리에게 ‘임신’이란 매개를 준 것처럼, 죽으면 안 되는 이유, 불행은 언젠가 끝이 나고 다시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을 만들어줬더라면, 마지막 책장을 덮고 안타까운 마음에 이렇게 많은 눈물을 흘리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배가 불룩하게 나온 바리가 굴뚝이 있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라 다짐하며 토끼, 나나진과 함께 이사 가는 것으로 이 소설은 막을 내리지만, 바리의 삶이 해피엔딩이 되길 염원하는 한 독자로서, 그녀가 자신과 청하를 똑 닮은 아이를 키우며 소소한 행복을 느낄 수 있도록, 슬픈 기억만 남겨진 굴뚝으로 다시 오겠다는 다짐을 잊을 만큼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해 본다. 산파, 연슬, 청하사 할머니의 혼을 위로했듯, 그녀 자신의 혼도 부디 위로받길. 계속 힘겨운 삶을 살았던 바리와 이 세상 모든 바리들에게는 행복할 권리가 있으니까.
문득, 작년에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 하나가 떠올랐다. 친모의 관심 밖으로 버려진 5살 남아가 친모의 내연남에게 지속적으로 폭행을 당해 한쪽 눈이 실명하고 고환 하나를 제거해야 했던 가슴 아픈 이야기이다.
부모 된 자라면 5살 아이의 모친처럼 한 생명을 낳아놓고 방관해서는 안 되며, 소설 속 바리의 모친처럼 자신이 원하던 성별이 아니라고 버려서도 안 된다. 남편이 감옥살이하게 되어 청하사 할머니에게 청하를 버린 모친처럼 남편의 일을 빌미로 청하사 할머니에게 돈을 끊임없이 요구하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될 일이며, 가족을 찾겠다며 도움을 청하는 바리의 순수함을 이용하여 한 남자가 성폭행을 자행한 일처럼 부당한 일을 아이들이 겪게 해서도 안 될 일이다.
또한 타인의 자살을 도왔던 바리의 과오를 이용하여 부당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걸 역으로 이용하며 협박하는 녹쇠와 같은 존재가 있어서도 안 되며, 비록 그들이 자살을 원했다고 할지언정 가장 어리고 유약한 존재에게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일들을 하게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이처럼 누군가는 방관하고 누군가는 폭행하고 또 누군가는 버리고 그 모든 것을 가장 유약한 존재가 감내해야 했던 상황들을 지켜보면서,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을 마주하는 것 같아 눈을 똑바로 뜰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알고 싶지 않아 외면했고 그래서 진짜 모르게 되어버리는 우리들의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고통 속에 사는 이들이 계속 발생하는 것 같았기에, 이 글을 쓰는 중에도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 사건에 대해 지인과 얘기하면서 나온 말이 있다. 지인의 딸은 현재 남편의 잦은 폭언에 의해 불안감을 느껴 심리 상담을 받고 있는데, 아빠에 대한 애정을 변함없이 보이고 있다고 했다. 심리상담 선생님은 딸아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지인의 말에 이렇게 얘기했다고 한다. 아이들은 엄마와 아빠를 좋아하는 데에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엄마라서 아빠라서 좋아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위에서 예를 들었던 5살 남자아이도, 지인의 딸도, 지금 이 순간에도 버려지고 있을 수많은 아이들도, 버려지고 상처받아도 부모이기 때문에 그리워한다. 그래서 속상하다. 아이들은 이유 불문하고 엄마 아빠를 외치는데, 정작 부모 된 자들은 내 마음 같지 않다고, 어쩔 수 없다고, 원하지 않는다고 자신의 아이들을 버리다니.
우리 자신이 소중하듯 우리의 아이도 그만큼 소중하게 대했다면, 성별이나 외적인 조건과 상관없이 아이들의 성장을 통해 느끼는 근원적인 행복에 초점을 맞추었더라면, 이러한 비극이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또한 이 시대를 짊어지고 가는 어른으로서 우리 아이들이 가족으로부터 폭행을 당하며 관심 밖으로 버려지고 있다는 사실과 태어나자마자 베이비박스에 버려지는 아이들이 6년 간 약 900명을 넘어섰다는 사실에 대해서 외면하지 않고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라면, 버려지고 상처받는 가정이 발생하지 않도록 국가에서 적극적인 관심을 보여주었더라면,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버렸다는 무책임한 핑계가 나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
최근에 SBS스페셜을 통해 소개된 건설설계 소프트웨어분야의 어느 회사에서는 직원들을 위해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복지를 제공하며 삶의 본질과 행복을 탐색하도록 끊임없이 장려한다. 무스펙, 무정년, 무징벌, 무상대평가라는 가치관을 내세워 4년마다 자동 승진되도록 하며 놀라운 수준의 사내식당을 직원들에게 제공하는 그 회사는, 인당 연간 1,000만 원이 넘는 식사비용을 아까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놓치고 있었던 ‘삶의 이유, 행복, 나의 정체성’ 등과 같은 다소 철학적인 부분에서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도록 독려한다. 나도 그런 회사에서 일하는 직원이었다면 ‘버려지지 않고 충분히 존중받는 직원’으로서 삶에 대한 근원적인 탐색을 해나가며 열심히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위 사례를 든 회사와 같이 직원들이 ‘한 회사의 가족과 같은 존재’로서 존중받는 느낌이 들 수 있도록 어떤 회사도 하지 못했던 최상의 근무환경을 제공하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우리가 발을 내딛고 서있는 이 땅에서도 다른 곳에서 상상하지 못했던 변화의 물살이 굽이굽이 흘러 지금의 사회적 문제들을 씻어준다면, 우리의 삶도 희망의 싹이 자라나 ‘버려지는 삶’을 상상조차 하지 못할 미래를 꿈꿀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바리와 청하, 그리고 주변 인물들이 원했던 것처럼 버려지지 않는 삶이 곧 행복이다. 가족 또는 사회에서 버려진 것 같은 느낌이 들 때, 나 하나쯤 없어져도 아무도 모를 것이라는 비관이 들 정도로 인생이 무의미해질 때, 그 순간 손 잡아줄 수 있는 곳이 우리가 발을 내딛고 있는 이 나라라면, 쓰러지더라도 다시 일어서서 묵묵히 걸어갈 수 있는 우리들을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위 사례를 들었던 것처럼 진정한 행복과 삶이 무엇인지, 무엇이 결핍되어 이러한 부조리가 발생하는지, 우리 모두가 이제부터라도 스스로 끊임없이 묻고 답한다면 언젠간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아 좀 더 밝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지 않을까.
자연도 세월도 사람도 흐른다. 그 흐름의 시작도 끝도 알 수 없지만 어느 곳을 흘러가더라도 그 근본이 ‘긍정적이고 밝은 뿌리’로 자리한다면, 상처받은 영혼들의 얼룩이 지워지고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미래를 기쁘게 맞이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오늘따라 유독 6개월을 갓 넘은 내 아들의 모습이 애처로워 보인다. 내 아들처럼 단란한 가정 안에서 한참 사랑받고 자라야 할 수많은 아이들이 지금도 버려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파오고, 앞으로 험한 세상에서 몇 번이고 버림받을 우리 아들의 미래를 떠올리니 가슴이 아려온다. 또 다른 바리가 태어나지 않도록, 내 아들이 세상에서 외면당하거나 버려지지 않도록, 이제부터라도 우리 모두가 깊이 고민해 나가야 할 것이다.
책장을 덮고 나니, 촉촉하게 젖은 내 뺨 위로 건조한 방 안의 공기가 미끄러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책 속 주인공인 바리의 혼도 이 세상 모든 바리들의 혼도 부디 위로받길, 변화의 흐름이 일어 상처가 씻겨나가길, 그리고 모두가 행복해지길... 간절히 기도하고 싶은 마음만 드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