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공모전 수상작 2
- 불평등한 아픔에 대한 자화상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고

by 지혜


유독 선풍기의 바람소리가 크게 들린다. 이제 막 잠든 아들의 쌔근쌔근 소리도 유난히 귓가에 맴돈다. 이렇게 적막한 기운이 감도는 이 시간, 따뜻함을 넘어서 뜨거운 온기가 느껴지는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라는 이 책을 읽는 내내 사회적으로 수면 아래에 놓여있던 많은 아픔들이 내 안으로 조용히 흘러들어와 나에게 이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너는 지금 그 아픔들에 대해 얼마나 떳떳하냐고, 정말 뼈저리게 경험한 적이 있지 않느냐고 말이다.


안타깝고 아픈 과거 사건들을 다시금 떠올리는 일과 그 일이 일어났을 당시에 나는 무엇을 했는지 참회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국민으로서 돈 벌기 바쁘다는 핑계로 많은 아픔들을 살펴볼 여력이 없었다는, 누구나 다 하는 그런 핑계를 감히 입 밖으로 낼 수도 없었다. 이렇게 깊이 사유하게 만드는 힘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차별, 사회적 고립, 고용불안’이 인간의 몸을 해칠 수 있다는 ‘사회역학’에 대해 설명하면서 의료기술 발전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많은 사회적 문제들을 하나씩 짚어나가고 있는 저자 김승섭 교수의 고매한 정신이, 이 책 안에 온전히 깃들어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의 정신이 나를 과거로 데려가 아픈 사건들을 다시 한번 각인시키는 힘으로 촉발되었고, 개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 원인으로 관점을 달리 해야 한다는 그의 일침이 내 심장을 얼얼하게 만들었다. ‘사회적 원인으로 발생하는 모든 불평등한 문제들은 다름 아닌 너와 같은 개개인들의 무책임한 행동이 모여 만든 자화상과 같은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에.


그렇다. 저자는 세상에 내놓는 자신의 첫 책을 통해 ‘사회역학’은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아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바꿔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학문이라고 소개하지만, 개개인의 삶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이 어디까지인지 이 사회가 던진 질문을 사람들과 깊이 고민하며 이야기하고 싶었다는 그의 말속에는 우리들의 책임도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었다. 이 사회의 모든 법과 제도, 문화를 우리들이 만들어나가는 것처럼, 사회적 원인 또한 우리의 무관심과 무책임함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건강에 해로운 ‘레이온 생산 기계’를 폐기처분하지 않고 가난한 나라에 전달했던 일본과 우리나라의 사회적 책임이 기록되어 있는 제2장 ‘위험한 일터는 가난한 마을을 향한다.’가 이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일본 회사인 동양레이온이 인조실크로 불리던 레이온 생산 기계를 우리나라에 전쟁배상 물품으로 내놓았을 때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건강 이상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을 통보하지 않아 900명이 넘는 한국 노동자들의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것과, 이러한 아픔을 겪었던 한국 정부 또한 중국 단둥시로 레이온 생산 기계를 보내 중국 노동자들의 삶을 망가뜨릴 사회적 원인을 제공했다는 내용들이 여기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모든 사회적 원인들은 우리들의 떳떳하지 못한 태도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체감할 수 있었던 대목이었다.


다양한 차별 경험을 하면서도 ‘해당사항 없음’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예, 아니오.’로 솔직하게 대답한 사람보다 더 많이 아프다는 것과, 자연재해 속에서 질병으로 인해 혹은 혼자 살기에 사회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더욱 사망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 실직자나 노인과 같은 사회적 취약계층이 안전하지 않은 임상시험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은 우리도 모르지 않는다. 다만, 살아가기 힘든 현실 안에서 스스로의 안위부터 챙기기 급급하여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아픔’들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하고 얼마나 더 많은 의무들을 가져야 하는지, 우리들의 무관심과 무책임함이 방금 예를 들었던 ‘레이온 생산 기계’와 같은 아픔들을 얼마나 많이 양산하는지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렇기에 더욱 이 책이 우리들에게 필수 불가결한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책의 첫 장을 펼친 후 저자 김승섭 교수가 나를 맨 처음 데려간 곳은 ‘말하지 못한 상처, 기억하는 몸’에 대한 내용을 다룬 사회였다. 성차별, 인종차별, 불평등한 아픔 등 여러 가지 형태의 아픔이 존재하는 사회.

그런 사회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가 겪었던 지난날의 아픔들이 떠올랐다.

‘요즘 여자들은 쉬고 싶어서 출산휴가 3개월과 육아휴직 1년을 다 쓰려고 한다.’라며 여자는 남자에 비해 애사심이 없다는 질타를 받고, 본인들도 힘든데 임산부 자리를 지정하는 것은 역차별이라며 자리 양보를 받지 못하고, ‘그래도 손님한테 남자가 커피 대접하기는 좀 그렇잖아.’라며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강요받았던 일들 모두 내가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겪어야 했던 아픔들이었다.


각자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남산만 한 배를 움켜쥐고 힘겹게 서있는 내 모습을 봐도 자리양보를 못했을 것이라고 애써 이해했었고, 사무실에 여자가 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역할을 강요받아도 그러려니 넘어갔었으며, 육아를 전담한 적이 많지 않은 남자들이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보장된 1년 3개월을 쓸 수밖에 없는 ‘엄마’들의 생각을 읽을 수 없는 것이라고 이해하려 했었다. 왜곡된 인식으로 점철된 사회적 환경에서 홀로 인내해야 했던 그 기간 동안 이유 없이 체한 듯 아프고 힘들었다. 그저 임신을 해서 아픈 것이라고 스스로 다독였던 지난날이, 그저 일시적으로 겪는 차별일 뿐이라며 내 탓으로 돌렸던 지난날이, 이 책에서는 심리적으로 불편함을 덜기 위해 그렇게 생각한 것일 뿐 차별과 같은 사회적 폭력을 당연하듯 행사하는 그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위로해주고 있었다. 그러한 사회적 관계가 인간의 몸에 질병으로 남긴 상처를 해독하는 학문, 즉 ‘사회역학’을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저자 김승섭 교수는 그렇게 내 등을 토닥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들에게 내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은 책임도 있었다. 육아 휴직은 놀기 위해 내놓는 여자들의 회피수단이 아니라 아이를 최소한 1년 3개월 만이라도 직접 돌보고 싶은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임산부 지정석은 새 생명을 위한 배려를 뜻하며 커피 타는 일은 남자들도 할 수 있다는 정당한 사실을 말하지 않은 책임을 말이다.

모든 사람들의 아픔을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 의견을 내는 것이 조심스럽다며 스스로 괜찮다고 되뇌었던 그런 행동들은, 나와 같은 아픔을 겪는 모든 약자들에게도 결코 좋은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회적 원인’은 권리를 주장하지 못했던 나와 같은 사람들과, 왜곡된 방향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의 행동이 모여 이루어낸 자화상과 같은 현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낸시 크리거 교수는 “역학과 원인의 그물망 : 거미를 본 사람이 있는가?”라는 논문을 통해, 그물망처럼 얽힌 여러 질병의 원인들을 개인의 나이와 가족력과 생활 습관에 대한 ‘개인적 원인’에서 그칠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공동체가 어떤 곳인지 묻는 ‘사회적 원인’도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위험한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에게 담배를 피우면 10년 뒤에 폐암이 발생할 수 있으니 금연해야 한다는 ‘개인적 원인’에 초점을 두는 주장이 지금 당장 죽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환경’에 놓인 그들에게 설득력을 얻기 힘든 것처럼, 개인이 처해있는 사회적 환경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 환경이 안전하지 않다고 해서 개인적 원인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건강한 삶을 위해 그들도 권리 주장을 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환경에서 근무하는 직장인들도 건강검진을 하고 안전교육을 받는데, 현장에서 일하는 일용직 노동자들은 왜 건강검진과 안전교육을 받지 못하는지에 대한 권리 주장을 말이다. 고용불안과 안전하지 않은 환경 때문에 담배와 술에 의존하게 된다면, 오히려 ‘사회적 원인’과 ‘개인적 원인’이 결합하여 건강하지 못한 삶에 가속도가 붙는 결과만 낳을 것이다.


이 책 안에서 다루어졌던 루마니아의 ‘낙태 금지 결정’이 초래했던 일화도 이와 다르지 않다. “루마니아에서 낙태금지를 시행한 이후, 낙태수술이 가능한 거짓 진단을 위해 의사에게 뇌물을 건네거나 유산하기 위해 위험한 방법을 선택한 여성들도 증가했다. 모성사망비가 급증할 정도로 불법 시술을 받은 많은 여성들이 여러 합병증을 앓게 되어 사망했고, 고아원 시설에서 자라나는 아이 수가 증가했으며, 가난한 환경에서 원치 않은 임신으로 낳게 된 아이들은 영양 결핍에 시달려 유아사망률 증가로 이어졌다.”와 같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했던 ‘사회적 환경’은, 루마니아의 잘못된 결정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것을 이 책에서는 지적하고 있었다. 개인에게 낙태 금지를 명하면 출생률이 높아질 것이라는 ‘개인적 원인’에 초점을 맞춘 억측이, 참혹한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다시 한번 체감할 수 있었던 지점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에 원인과 결과가 있듯이 누구 하나만 일방적으로 잘못되었다는 논리로는 이 세상에 산재해 있는 부조리를 바꿀 수 없다. 낙태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합법적인 낙태수술을 위해 의사에게 뇌물을 건넬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유산하기 위해 계단에서 뛰어내릴 것이 아니라, 몰래 아이를 낳고 고아원에 버릴 것이 아니라, 불합리한 국가 결정에 끝까지 반대하며 자기 결정권을 지켰어야 했다. ‘사회적 원인’을 초래한 국가의 결정과, 자신의 몸과 새 생명을 포기했던 많은 ‘개인적 원인’들이 한데 모여 이루어낸 결과를 바라보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적극적인 목소리들이 한데 모였다면 이토록 안타까운 과거의 기록들을 펼쳐보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는 씁쓸함을 느낀다.


이와 같이 “다양한 차별 등 사회적 폭력으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좀 더 보듬어주고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이 사회에 있었다면, 사회적으로 고립된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가 건강상태를 확인하고 사회적인 원인을 찾아 대응을 한 시카고의 사례를 적극 반영해 시행했더라면, 취약계층을 포함한 모든 국민들이 실업과 재취업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못할 정도로 폭넓은 지원을 받거나 어떠한 경제위기에서도 안정을 느낄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더라면”과 같은 국가의 사회적 책임을 물으면서 동시에, “우리가 느끼는 ‘차별, 사회적 고립, 고용불안’에 대한 문제 개선을 위해 당사자들 또한 적극적으로 노력했더라면”이라는 개개인의 책임도 물어야 할 것이다.

공동체는 특정한 사회적 공간에서 공통의 가치와 유사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단이기 때문에, 그 집단을 이루는 개개인도 이러한 의무와 책임을 간과할 수 없다.


첫 장에서 마주했던 많은 아픔들과 유사한 일을 겪었던 한 사람으로서 그동안 왜 망각하고 회피하려고만 했었는지 참회하고 있었던 나는, 또 다른 아픔의 길인 ‘질병 권하는 일터, 함께 수선하려면’이라는 곳으로 향하게 되었다.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삼성반도체 직업병 소송, 고용불안에 대한 문제점이 산재해 있는 길이었다.

일방적 정리해고에 맞서 싸우다 ’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라 재취업조차 허용되지 않았고 이로 인한 경제적인 문제와 회사에 대한 배신감 때문에 차례대로 세상을 떠났던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와 그의 가족들,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난소암에 걸렸던 고 이은주 씨와 다발성경화증에 걸렸던 이소정 씨 등 고용불안과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된 이곳은, 내가 겪었던 또 다른 아픔을 상기시켰다. 위험한 건설 현장에서 쓰러져 위험고비를 넘겨야 했던 아버지에 대한, 너무나 생생해서 망각하고 싶었던 아픔을 말이다.


위험한 환경에서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채 일해야 했던 아버지는 막노동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늘 자신의 무력함과 불안정한 고용환경, 안전하지 않은 현장에서 일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았었고, 결국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어느 날 현장에서 일하던 도중 쓰러지게 되었다. 만약 다양한 직업교육을 받아 좀 더 안전한 직장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노동자들을 위한 정기적인 건강검진과 제대로 된 안전교육이 이루어졌다면 우리 가족과 현장 책임자 모두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과연 아버지는 지금처럼 이렇게 아팠을까, 하는 의구심이 뇌리를 스친다.


최근에 보도되었던, 2017년 상반기까지 해고자 전원 복직을 위해 노력한다는 합의서가 지켜지지 않아 억울한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30번째 죽음, 김 조합원의 이야기와, 삼성전자 반도체 근로자의 백혈병 문제에 대한 갈등 해결 관련 기사도 마찬가지이다. 사측에서 근로자를 소중히 여기며 ‘아픔’들에 대한 신속한 대안을 마련했다면, 주변에서 좀 더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주었더라면 진작 이런 불평등한 아픔들은 보도될 일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위에 언급했던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사건에 대해 연구를 진행하던 저자 김승섭 교수는 ‘무엇이 그토록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을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이게 했을까.’라는 의구심에서 출발하여 ‘한국은 해고된 노동자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바뀌면서 중요한 원인을 발견하게 된다.


정리해고 직후인 2009년부터 2015년까지 해고노동자들의 6년간의 주 수입원은 ‘일용직, 사내하청 및 외부 파견기관 근무, 자영업, 보험판매직, 트럭장사’였다. 안정적인 재취업을 위한 직업훈련과 교육을 제공하지 않았던 사회적 시스템의 결핍으로 인해 그들은 불안정한 고용환경으로 향해야만 했던 것이다. 실업률이 증가하면 그 사회의 자살률이 증가한다는 사실을 뒤엎은 스웨덴의 사례처럼 실업 후 30일 이내에 고용지원센터에서 실업자를 위한 일자리 창출 기회를 지원하는 스웨덴의 ‘적극적 노동시장 프로그램’을 보며, ‘한 사회가 해고노동자를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해 우리들의 책임과 의무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우리 주변에 많은 아픔들이 쌓여가는 동안, 저자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에 대한 아픔을 연구하고 기록하는 동안, 우리는 과연 그 시간 동안 무엇을 한 것일까, 하는 깊은 후회도 하면서.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한다. 부조리한 사회 시스템으로 인해 자살을 결심하는 이들이 생긴다면, 그들은 자살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존엄을 선택한 것이라고. 더 이상 삶을 이어갈 수 없는 그들이 택한 최후의 존엄은 지켜져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 존엄은 억울한 것이다. 만약 사회가 어떤 직종이든 차별 없이 배려받고 안전한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지원했더라면, 직장을 잃어도 그다음 직업이 보장되는 사회였다면, 그리고 국가에서 외면한 그들을 주변 이웃인 우리들이 좀 더 관심을 갖고 지지해 주었다면, 과연 그들이 그런 선택을 했을까.

2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지하철 2호선 구의역 스크린도어 수리 청년노동자 사망사고’도, 최근에 세종시 화재 사고를 통해 드러났던 많은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도, ‘사회적 고립과 차별, 고용불안’이라는 사회적 시스템의 부작용도 있지만, 그런 일들이 끊임없이 발생하게 된 원인에는 결코 우리의 책임도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건강해야 공부할 수 있고 투표할 수 있고 일도 할 수 있으며 가정도 지킬 수 있다. 삶은 유한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수명조차 단축시킬 위험이 있는 일터는 어느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원래 위험했기 때문에 그런 희생들이 불가피하게 뒤따르는 것이라는 저급한 인식과 위험하고 고된 일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직종이라는 편견을 벗어버리고, ‘직업에 귀천이 없다.’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정도로 평등하고 건강한 사회를 구현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외주용역업체에 소속되어 적은 임금이라도 받기 위해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 일해야만 했던 청년들, 기본적인 안전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온갖 질병을 일으키는 위험한 현장에서 일해야 했던 사람들, 사고 현장으로 출동하며 늘 열악한 환경과 함께 해야 하는 소방관들, 쌍용자동차의 일방적인 정리해고로 인해 아픔을 홀로 견뎌내야만 했던 노동자들을 외면하면 안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저자 김승섭 교수는 변화를 향한 선두주자가 되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이 책 한 권으로 바뀔 수 있는 사회는 아니겠지만, 이 책을 필두로 해서 많은 독자들이 깊이 통감하며 ‘아픔’을 대하는 행동이 변화될 수 있도록, 길 위에 산재한 부조리한 아픔들을 외면하지 않도록 이끌어 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인도하는 또 다른 ‘아픔의 길’로 쉬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세 번째로 나를 이끌었던 곳은 슬픔이 길이 되기 위한 그의 생각이 담긴 곳이었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참극을 미래의 우리 아이들이 또다시 맞이하지 않도록 해당 사건을 재조명한 그는 이렇게 말한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기억되지 않고, 기억되지 않은 참사는 반복되기 마련이라고, 세월호 참사를 우회하고는 우리의 다음 세대가 살아가야 할 안전한 대한민국은 불가능하다고. 그래서 그가 말하는 ‘슬픔이 길이 되기 위한’ 방법은 '기록'이었다.

그리고 기록은 곧, 사회적 원인을 제공하는 우리들의 행동과 사회적 문제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수준이 담긴 자화상이 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발생했을 때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의 최초 명칭인 ‘포탄 충격’이라는 개념이 생겼고 정신과 진단 매뉴얼인 ‘D S M-I'이 출판되었지만, 평화로운 시기가 계속되면서 이에 대한 관심이 시들어졌다. 베트남에서 미국이 패배하고 참전 군인들이 돌아오면서 다시 관심이 커지기 시작했다.’라는 기록들을 천천히 훑어보면서, 전 세계인이 ‘아픔’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깊이 체감하게 되었다. 수면 위에 아픔이 떠오르면 모두 관심을 갖지만 이내 그 아픔이 가라앉으면 당장 보이지 않기 때문에 관심 있게 지켜보지 않는다는 사실을. 사라지지 않고 수면 아래에 있는데도, 사람들은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 아픔은 ‘괜찮은’ 것이라고 합리화하는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특혜를 많이 받아간다며 언론의 무분별한 보도만을 믿고 수군거리는 사람들, 장기적인 치료가 요구되는 세월호 생존자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보여주기식 치유프로그램으로만 진행했던 사회적 시스템, 4년이 지나도 밝혀지지 않은 세월호 진실, 그리고 나와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고 ‘틀렸다’며 무조건 성소수자를 배척하는 행동들 모두 ‘아픔’을 겪는 사람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그 행동들이 모여 불평등한 사회적 문제를 만들고 그 아픔이 결국 우리의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망각하고 있는지 보여주고 있는 자화상들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가 나를 보호해 줄 수 있다는 확신,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함께해 줄 것이라는 확신을 보여준 로세토 마을의 이야기처럼, 활기가 넘치고 꾸밈이 없으며 신뢰를 기반으로 상호부조의 문화를 이루어나가는 그들의 원동력을 조금이라도 우리 사회에 옮겨놓는다면, 미래에 우리 아이들이 걸어갈 그 길은 불평등한 아픔이 아닌 ‘평등하고 따뜻한 사회’가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위해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불평등한 아픔을 대하는 행동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냥 노력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이 방관하고 있는 동안 쌓여왔던 많은 아픔들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쓰러지기 직전까지 가족들을 위해 일했던 가장의 절실한 마음처럼, 그런 절실함이 묻어 나오는 노력이 필요하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니 남루한 차림을 한 아버지가 길거리에서 어린 나를 향해 손짓했던 그날이 문득 떠오른다. 다섯 식구를 위해 불평등한 아픔을 홀로 견뎌냈던 아버지의 고된 내면을 모른 채 허름했던 외관만을 보고 당신이 부끄러워 도망쳤던 그날 만약 그때 그 손을 잡아드렸다면 과연 아버지는 지금처럼 아픈 모습으로 내 옆에 자리하고 계셨을까, 하는 후회가 다시 한번 내 혀끝에서 감돈다.


불평등한 아픔에 놓여있던 아버지를 외면했던 그날처럼 나는 지금도 아픔을 마주할 때마다 스스로 괜찮다는 말 한마디로 자신을 속이고 있었다. 난 그 아픔들과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타인이 겪는 아픔에 같이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착각해 왔던 지난날을 생각하고 있노라니, 내 안에 있던 많은 아픔들이 뚜렷한 물줄기를 일으키며 나에게 다시 한번 묻는다. 너는 지금 그 아픔들에 대해 얼마나 떳떳하냐고, 정말 뼈저리게 경험한 적이 있지 않느냐고.


불평등한 아픔을 대해왔던 나의 떳떳하지 못했던 태도들과 그러한 아픔들을 경험했음에도 나와 무관하다며 망각했던 행동들이 투명한 거미줄이 되어 나를 향해 뻗어온다. 거미줄을 자신의 몸에서 빼내어 집을 짓는 거미처럼 우리의 잘못된 행동들이 불평등한 아픔을 생산하는 사회적 원인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깊이 반성하게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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