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모전 수상작 3
- ‘이상적인’ 열린 공동체를 그리며

<이상한 정상가족>을 읽고

by 지혜

어린 시절, 왜 몰랐을까.

가난 때문에 인상을 쓰시며 화를 내는 엄마의 모습이,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아빠의 처절함이, 그런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자라야 했던 내 유년시절이, 왜 그 당시에는 우리 가족 안에서의 문제라고만 생각했을까.

이 책을 접하지 않았다면, 서두에 적힌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공공의 역할까지 가족에게 떠넘겼고, 국가는 제 역할을 하지 않고 저만치 물러나 각 가족의 '각자도생'만 부추겼다'는 저자의 말을 깊이 헤아리지 않았다면, 심장을 뚫고 다가온 이 말들로 인해 생각의 변화를 겪게 된 지금의 나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회문제에 소홀했던 내가 한 아이의 부모가 되고 나니 이 책이 더 마음에 와닿는 이유를 알겠다. 여린 생명체가 유약한 채로 이미 내 삶에 깊숙이 관여하기 시작했고, 그만큼 밝은 미래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커지고 있기에, '너무 늦은 건 아닐까.'라는 후회와 번민이 깊이 스며들 만큼 더 늦어버리면 내 아이가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삭막하고 불합리한 사회가 만들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아이의 부모이자 직장생활을 하는 사회인으로서 지금까지 외면해 왔던 많은 사회 문제들을, 특히 '작은 인간'에 대해 폭력적인 우리 사회의 민낯과 '가족'에게만 짐을 지우는 공공 역할의 문제들을, 이 책을 꼼꼼히 읽어 내려가며 제대로 바라보고자 노력했다. 땀이 아닌 눈물로 촉촉해진 내 뺨이 많은 깨달음과 반성으로 얼룩진 흔적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이 말을 들은 모두가 이 책을 펼쳐 들고 함께 변화할 준비를 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하면서.


이러한 희망이 내 마음속 깊이 똬리를 틀기 시작할 즈음, '보편적인 인권은 작은 곳, 그리고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된다.'라고 말했던 엘레노어 루스벨트의 글을 보게 되었다.

내가 그동안 봐왔던 보편적인 인권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성적 때문에 아이에게 체벌을 가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다는 이유로 자녀를 방임하거나 학대하는 부모, 계약직이라고 차별을 두는 사람들, 회사에서 필요는 없지만 함부로 해고할 수 없기에 왕따를 시키는 집단주의, 자신과 의견이 다른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고 집단주의 논리로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사람들, 사람을 부품처럼 쓰다 버리고 약한 존재의 아픔을 무시하는 이 사회가,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내가 체감했던 '보편적인 인권'의 모습이었다.

'작은 인간'을 소유물처럼 다루며 인권을 존중하지 못하는 '큰 인간'들은, '작은 인간'에게 행했던 무의식적인 사회적 폭력을 사회에 나가서도 자신보다 유약하고 하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상대에게 행사하고 있었다. 체벌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질수록 아동학대를 막을 수 없다는 저자의 말에서, 약자에 대한 무의식적인 사회적 폭력을 인식하지 못하면 모든 유약한 존재의 억울한 희생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또 다른 해석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아이와의 관계를 통해 관계의 본질을 끊임없이 탐구하는 저자 김희경은, 그렇게 공동체의 수준은 약자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수준이 결정된다는 진리를 행간을 통해 꾸준히 드러내고 있었다.


잠시 책을 내려놓고 벚꽃이 흐드러진 언덕길을 올라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뒤에 있는 나를 보고는 다시 힘차게 중심을 잡고 나아간다. 엄마라는 든든한 기둥이 곁에 있다는 사실에 안심을 한 모양이다. 아이의 성장과 함께 '든든한 부모'로 성장해야겠다는 막중한 의무감이 드니, '억압과 차별로 일그러진 우리 사회의 영혼은 '1차 사회화 기관'이자 생애 초기의 인간인 아이들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가족'에서부터 그 모습이 드러난다.'는 저자의 말이 떠오른다.

나날이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는 아이에게 늘 한결같은 울타리가 되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면서, 그 모습에 비추어 내 유년의 모습들을 겹눈으로 바라보게 됐다. 내 아이처럼 밝은 발걸음을 했어야 할 어린 시절, 아이들의 수난사가 왜 '아동인권'이라는 사회적 의제를 형성하지 못하고 제각각인지 혼란스러웠다는 저자의 말이 내 안으로 깊이 스며들면서 과거의 기억이 어둡게 떠오른다.


사회적 잣대로 바라보는 정상가족 테두리에 있었던 나는, 사회적인 시선으로 보았을 때는 행복해야 마땅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행복의 조건은 정상가족 유무에 있지 않았다. '사회적 안전망'이 튼튼한 사회에서 '공적 안전망'과 '사적 안전망'인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잘 어우러져 있느냐, 우리들이 실패해도 다시 발돋움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회적 안전망이 존재하는가. 이것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었다.


사회보장제도 실시 경험이 거의 없었던 대한민국에서 성장해야 했던 나는, 모든 사회 책임은 당연히 우리 가족 안에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부모님은 서로를 비난했고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폭언과 폭행을 행사하는 상황에 나는 늘 노출되어 있었지만, 고등학교 의무교육을 마치고 취업하면 해결될 수 있는 일이라고 믿었다. 해외 입양된 아이의 사망을 '아동학대'라는 명제와 거리를 두고 이주노동자, 난민 신청자의 자녀들이 겪는 차별에 소극적이던 사회분위기처럼,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던 우리 가족 내부의 억압된 상황들은, '부모들이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해도 힘의 차이를 생생하게 드러내, 힘과 권력에 따른 불평등함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기 쉽'도록 나에게도 사회적 폭력이 가해진 것이라는 걸 전혀 몰랐다.


억압받았던 어린 시절을 치유하지 못한 채 세상과 부딪치며 마주했던 나약했던 내 한계들과, 나보다는 타인을 위해 애쓰며 살던 낮은 자아존중감은 당연하듯 내 속에 자리했다. '세상은 어떤 것이고 나는 뭘 하고 싶다.'라는 고민도 제대로 다져보지 못했던 지난 삶들은, '작은 인간'으로서 인권을 존중받지 못하고 가족을 위해 이른 나이에 취업을 해야 했던 과거를 회피하기 위한 핑계가 되었다.

'아이에게 직접적으로 폭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배우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면 '자녀의 심신의 성장, 인격의 형성'에 중대한 영향을 준다.'라는 글귀처럼 힘들고 억압받았던 어린 시절 덕분에 극도로 예민한 내 성격이 형성되었을 수 있지만, 그 '힘듦'과 '억압'의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힘과 권력에 따른 불평등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상을 방관하는 공공 역할의 부재 때문에 일어난 이유도 있으니, 꼭 개인의 책임으로만 물을 수도 없는 일이다.


공공역할의 울타리가 제대로 작용하여 우리 가족에게 조금이라도 손을 내밀어주었다면, 아버지가 지금처럼 이렇게 아팠을까. 개인의 몫이라고 하기에는, 공사현장에서 쓰러진 후 오랜 기간 병원신세를 져야 했던 아버지의 모습과, '가난'이라는 굴레에서 배우자를 평생토록 보살펴야 했던 어머니의 야윈 허리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진다.


어린 시절을 아프게 되새긴 후 주변을 둘러보니 가슴 아팠던 많은 사건들이 내 마음에 재각인 되는 것을 느꼈다. 돈을 벌기 위해 지방으로 내려가야 했던 친부가 어린이집 원장에게 아이를 맡겼으나 원장 부부의 폭행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간 한 아이, 친모의 남자 친구에게 지속적인 폭행을 당해 한쪽 눈이 실명되고 고환 하나를 제거해야 했던 아이, 그리고 최근에 발생했던 안타까운 사연들도.

너무나도 많은 아픔들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다.


가족 내 가장 취약한 사람인 아이를 중심에 놓고 가족주의가 불러오는 세상의 문제들을 바라보자고 제안하는 저자의 말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당연시해왔던 '체벌'과 '가족주의'에 대한 인식이 위 사례처럼 얼마나 심각한 상황을 발생시키는지 깊이 되짚어볼 수 없었을 것이다. 스티븐 핑거가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는 책을 통해 체벌 찬성률은 살인율과 궤적이 같다고 설명한 것처럼, 우리들이 '체벌'과 '학대'는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가족주의'라는 잣대가 얼마나 타인을 배척하고 무관심을 일으키는지 알지 못한다면, 안타까운 사건들의 반복은 불가피할 것이라는 것도 이 책이 아니었다면 알지 못했을 내용들이다.

가장 가까운 부모로부터 상처를 입은 수많은 아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부모'를 간절히 원한다. 이유 불문하고 부모를 외치는 그런 아이들을 위해 우리는 지금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그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자신의 엄마, 아빠를 더 이상 부르지 않고 외면한다면, 우리는 어떤 무책임한 핑계를 댈 수 있을 것인가.


이제부터라도 사랑의 매라는 명목 하에 우리 아이들에게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하거나 모욕의 역설을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스웨덴 정부가 '체벌금지법'과 함께 체벌 대신 사용 가능한 훈육 방법을 설명하는 설명서를 배포하고 해당 법에 대한 설명을 우유병에 붙여 변화하기 위해 노력했던 모습처럼, 우리나라도 기성세대의 인식을 전환하는 데에 힘써야 한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뼈가 폐를 찔러 과다출혈로 사망했던 서현이의 이야기를 계속 뇌리에 각인하며 우리 모두 깊이 반성하는 노력도 더해진다면, 지금보다 더 밝은 미래를 예비할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의 개별성을 존중하며 타인과 공감하는 태도의 변화, 일상의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저자의 말처럼 인권을 존중하는 모두의 노력이 '새롭고 희망찬 내일'을 예비할 수만 있다면, 가족의 각자도생을 강요하고 구성원들을 옥죄어온 가족주의를 과거의 유산으로 흘려보냈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는 그날을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껏 무지했던 나 자신을 겸허히 돌아보며 느꼈다. 모든 불합리한 상황들을 가장 유약한 이들이 짊어져야 하는 현실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더욱 차별 없는 권리와 평등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공공의 역할과 가족의 역할이 절실하다는 것을.

이런 깨달음들이 나에게 기분 좋은 상상을 하게 만들었다. 40년 뒤 아들에게 희망찬 편지를 받게 될 그날에 대한 상상을 말이다.




사랑하는 어머니께,


어머니 잘 지내시죠?

오늘 제가 마트에서 봤던 훈훈한 장면 하나가 있는데, 이건 꼭 말씀드리고 싶어서 급하게 편지 써요. 안부를 더 물을 법도 한데, 아이 하원 시간 전에 올리는 글이라 시간이 없어 두서없이 써 내려가는 걸 이해해 주세요.

방금 동네 마트에 장 보러 갔었는데, 마트 직원 한 명이 바닥청소를 열심히 하고 있었어요. 바닥에 눌어붙은 껌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열심히 닦아내는 모습이 너무 인상 깊었는데, 제 옆에 있던 부부도 그랬나 봐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너도 나중에 커서 저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어머니가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던 행복한 세상, 모두가 존중을 받는 그런 세상이 지금이구나 싶을 정도로 많은 변화를 체감하는 요즘이에요.

고되고 힘든 일은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이 해야 한다는 편견이 줄어들고, 오히려 고될수록 존중받도록 힘쓰는 요즘의 사회 분위기, 공부보다 인성이 더 중요한 사회가 된 지금, 취약계층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높아지고 있어 각 지역별로 변호사, 사회복지사를 두고 그들을 지원해 줄 돌파구를 모두가 찾고 있어요.

지난날 '사교육 과열'로 인해 많은 아이들이 성적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적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죠. 부모의 기대 때문에 사교육으로 내몰린 아이들이 수면부족으로 고통을 호소하고 성적에 따른 체벌이 두려워 지옥 같은 매일을 살아갔던 지난날, 아이들의 행복지수가 굉장히 낮았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절 공부보다는 인성이 바른 어른으로 자라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셨던 일들이 기억나요. 체벌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지면 안 된다며 집안에 묵직한 돌 하나를 선반에 올려두고 늘 자각하고자 노력했던 어머니 모습이 기억나네요. 그 덕분에 지금 제가 우리 아이를 키우는 데에 너무나도 큰 자양분이 되었어요. 학교 뒷마당에 묻힐 뻔했던 아이들의 행복이 다시 생생하게 살아 놀이터로 복원된 작금의 사회를 목도하니, 아이의 인권을 지켜주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겠다는 의무감이 들어요.


이런 사회분위기에 감사함을 느낄수록, 보호소가 아닌 폭행의 근원지였던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많은 아이들이 생각나요. '내 자식 내가 키운다'는 강압적인 부모의 변명 뒤에 온몸이 매일같이 피멍으로 물들어 바들바들 떨고 있었을 유약한 존재의 아픔을요.

진작 '아이의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가 실현되었더라면, 많은 아이들이 억울한 삶을 살아가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이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애쓰고 계신 많은 분들을 생각해서라도 한 아이의 부모로서 큰 사명감을 갖고 꾸준히 지켜나가고 싶어요.


옆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네요. 옆집에서는 다문화가정이 사는데 아이와 놀이터에 가려나 봐요. 최근에 '자녀 살해 후 부모 자살'로 희생될 뻔했던 아이가 있었는데 옆집 부부가 그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고 있거든요. 꼭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어도 '작은 인간'의 인권을 존중하며 사는 옆집 가족과 같은 구성원이, 진정한 가족의 이상적인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아! 시계를 보니 앞집에 사는 비혼부가 아이를 데리러 나가는 시간이네요. 결혼을 선택하지 않아도 자신의 생물학적 아이는 반드시 책임지는 비혼부가 늘고 있는 요즘, 그에 대한 국가적인 책임도 증대되고 있다는 것도 어머니께 꼭 알려드리고 싶었어요. 결혼을 통해 가족을 이루는 모습만을 정상가족으로 간주하지 않고, 한부모든 비혼 부모든 다문화가족이든 차별받지 않고 사회적으로 동일한 지원을 받는 현 사회가 진정한 열린 공동체라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변화들이 열린 공동체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실현하는 좋은 현상이겠죠?

저도 이제 아이를 데리러 가야겠어요. 어머니 또 편지드릴게요. 늘 건강하세요.




폭력 없이 아이를 키운다고 해서 영원한 평화의 상태 안에서 살아갈 새로운 인류를 만들기 어렵다는 걸 잘 안다. 하지만 유토피아적인 발상으로 버무려진 이 편지를 통해, 지금 이 순간도 폭력을 겪고 있는 아이들이 조금의 희망을 갖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간절한 마음에 폭력에 민감하고 약자를 존중하며 다름을 인정하는 미래 사회의 이미지를 편지에 담아보았다.


저자의 말처럼 가족 안에서 가장 약한 사람의 아주 작은 권리조차 보장되지 않는다면 더 큰 세계에서 발전하려는 노력도 헛된 일이 될 수 있다. 사회가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과, 남을 이기지 않아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 부모의 소망이 아닌 스스로의 소망을 위해 원하는 방향과 속도로 갈 수 있도록 격려해 주는 사회 구현에 우리 모두가 힘쓴다면, 미래는 결코 어둡게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희망해 본다.

"한 사회가 아이들을 다루는 방식보다 더 그 사회의 영혼을 정확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없다."라는 넬슨 만델라의 문장처럼, 우리의 민낯이 결코 억압과 차별로만 일그러져 회복 불가능한 것이 아님을, 지금부터라도 시작되는 변화들이 우리 아이들의 행복하고 안전한 미래의 모습으로 귀결되기를.


나는 듣고 싶다.

누구를 위해 태어났는지 모르겠다는 아이들의 처절한 외침이 아니라, 스스로의 인생을 위해 개척해나가고 있다는 그들의 당당한 목소리를. 나는 무너졌었지만 국가가 손을 내밀어 다시 일어날 수 있었노라고 외칠 수 있는 따뜻한 세상의 목소리를. 정상가족이라는 틀에 사로잡히지 않고 '작은 인권'을 존중하는 이상적인 가족의 행복한 웃음소리도.


다시 상상해 본다.

밝고 활기찬 미래를 보장받은 우리 아이들이, 힘들고 어두웠던 지난날을 견뎌내 왔던 우리에게 행복한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라고 외칠 수 있는 그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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