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노볼 드라이브>를 읽고
녹지 않는 눈처럼, 흘러내리지 않는 단단한 벽과 같은 존재가 나와 아빠의 사이를 가로막은 지 10년째 되는 해였다. 예비신랑과 손을 맞잡고 걸어간 버진로드 위에서, 아빠의 모습을 바라봤던 그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아빠는 생각보다 훨씬 작아진 모습이었다. 난생처음 비싼 양복을 입었는데도 딱 맞지 않고 헐렁했다. 아빠가 옷을 입고 있는 것인지 옷이 아빠 몸에 잠시 걸쳐있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어색했다. 평생 입어보지 않은 양복을 입어서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그의 좋지 않은 안색을 눈으로 이리저리 살폈고, 가족석에서 몸을 기대고 앉아있는 모습을 열심히 눈에 담았다. 그렇게 애쓰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며 물었다. 단 한 번이라도 이렇게 아빠를 제대로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아빠의 모습을 처음으로 제대로 봤던 곳은 병원 응급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업하기 위해 노력하던 중이었다. 무능했던 아빠와 가난했던 집안 환경은 나를 이른 나이에 사회로 나가도록 등을 떠밀었다,라고 생각했다. 그 얕은 생각 때문에 아빠라는 존재는 내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존재를 생각하면 늘 술과 담배 냄새가 내 몸을 휘감는 듯 느껴졌다. 가족들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던 아빠의 외로운 마음을 술과 담배가 유일하게 위로해 줬던 것이었는데, 헛헛함으로 메말라진 아빠의 마음이 술잔에 채워진 술과 닮아 있었다는 걸 그땐 몰랐다.
그 몸으로 공사현장에 나가 일하려고 했으니, 응급실에서 마주한 결과는 당연했다. 깡마른 몸으로 누워있는 아빠를 가리키며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겠다는 의사의 말이 내게는 질책처럼 들렸다. 어느 누구도 아빠에게 일을 나가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끼니를 밥으로 채우는지 술로 채우는지 중요하지 않았다. 술잔에 담긴 슬픔으로 허전한 속을 적셨던 아빠는 가장으로서 의무를 다 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모루의 엄마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단 하루도 일을 나가지 않으면 망해버린 세상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을 것이다. 모루를 위해, 더 밑바닥으로 가지 않기 위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돈이 제일인 세상이지만 그 돈이 필요한 이유 또한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니까, 소각장에서 삶을 이어나가야 했을 거다.
폐렴으로 죽어가면서 모루를 끝까지 생각했을 모루의 엄마와, 응급실에서 작은 몸으로 의식을 잃고 있었던 아빠의 모습이 겹쳐진다. 힘든 세상에서 가족을 위해 일하며 애썼던 두 사람의 모습은,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던 두 세계는, 가장 위태로운 모습으로 내 안에 고스란히 함께 그려졌다.
그렇게 엄마가 떠난 후 모루에게 또다시 시련이 다가왔다. 이모의 눈에서 녹내장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안의 감정만 파고드느라 신경 쓰지 못했던 이모의 눈’을 위해, 자신의 온 세계가 천천히 무너져버리는 그 과정을 반복하기 싫어 모루는 그녀의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눈 소각장에서 일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소각장 노동자로 살아가기 시작한 이후, 단단한 벽이었던 이모라는 존재가 금이 가기 시작했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 집으로 가는 것을 차일피일 미뤘던 모루는, 결국 이모를 잃게 된다. 백영시에서 다른 도시로 향하는 도로의 절벽 아래에서 이모의 트럭이 발견되었고, 그곳에서 스노볼을 발견하면서 “힘들면 언제든지 그만두고 돌아와.”라고 말했던 이모의 마지막 모습을 모루는 뒤늦게 그리워했고 후회했다.
그래도 뒤늦게나마 여기저기 수소문하며 이모를 찾기 위해 노력했던 그녀와 달리, 나는 버진로드 위에 서기 전까지 아빠를 온전히 바라보기 위해 노력한 적이 없었다.
내 유년 시절의 아빠는 내 세계를 어지럽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안도하기도 했다. 지겨웠던 ‘폭력, 폭언, 술주정’ 이것들로부터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이 파도에 떠밀린 것처럼 내 마음을 계속 이리저리 흔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자신만의 세계 안에서 타인을 해석한다. 나의 세계를 뒤흔드는 모든 것들을 경계하고 판단하며 배척한다. 이해하고자 노력하지 않으면,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도 무의미하다. 동그란 세계 안에서 어떤 외풍도 낡음도 없이 보호받으며 아름다운 눈만 휘날리는 스노볼처럼, 거리의 온갖 쓰레기들이나 죽은 시궁쥐조차 전부 묻혀 언뜻 평화로워 보이는 녹지 않는 눈 위의 모습처럼, ‘숨을 뱉어 내는 인간의 속을 세세히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 안에서 영원한 안정과 이상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다가, 결국 소중한 것들을 잃게 되는 것이다.
안도했던 나의 세계는 사회에 나가고 나서야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미워하고 비난했던 아빠와 다름없이, 내 세계는 어른이 된 순간부터 책임감이라는 짐을 지고 힘들게 버텨야만 했다.
사회에 한 발자국씩 내딛을 때마다 아파서 정지했던 나처럼, 접질린 발목 통증 때문에 녹지 않는 눈을 피하지 못하고 방황했던 모루의 모습이 선명히 떠오른다. 원래 그렇게 사는 거니까 스스로 극복하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홀로 버텨야 했던 나와 달리, 다행히도 모루에게는 이월의 손길이 닿았다. ‘입춘이 든 달’이라는 뜻의 이월이다.
녹지 않는 눈을 피하기 위해 밀치고 스치며 지나가는 인파 속에서 구원의 손길을 건네준 유일하고 따뜻한 존재. 이월은 그렇게 ‘녹지 않는 눈’이 내렸던 첫 해에, 모루를 구해주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은 아픔을 겪는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이 생긴다는 말과 같다는 생각을 하게 해 주었던 장면이었다. 이월이도 참 많이 아팠으니까 위험에 처한 모루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어준 것이다.
연구소장인 아빠의 회사에서 자신의 강아지(하루)를 잃고 그 충격 속에 하루의 환영을 보며 외롭게 살아가는 이이월은, 모루 못지않게 외로운 존재로 이 책에 그려진다. 명예만 좇는 아빠와 완벽한 인생만을 추구하는 새엄마 사이에서, 이월의 옆에 존재했던 것은 강아지 하루뿐이었다. 모두가 헛소리로 치부하는 이월의 말에 새엄마가 귀를 기울여준 적도 있었지만, 살아있을 때도 죽었을 때도 온전히 이월의 곁에 있던 존재는 하루뿐이었다.
불안을 느낄 때마다 하루의 환영을 보게 되는 이월의 모습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우리 아빠도 힘든 마음을 달래주는 건 술과 담배뿐이었으니까, 이월도 그 힘든 마음을 위로해 주는 존재는 하루뿐이었으니까, 정말 당연한 현상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루의 엄마나 이모와 달리, 이월이 그런 상태에 이르게 됐을 때 “언제까지 그러고 살래?”라고 질타하며 자신의 명예만 생각했던 이월의 아빠는, 내가 아빠를 이해하고자 노력하지 않았던 것처럼 가족들의 마음을 알고자 노력하지 않았다. 심지어 이월의 새엄마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 때조차 자살이 아닌 사고사로 처리하고자 했다. 자살처럼 군말 많은 사인보다 면이 산다는 이유였다.
‘애초에 삶이라는 게 완벽한 계획이 가능할 리 없’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빠르게 변하는 것이 현실인데, 무엇이 그토록 이월의 아빠를 명예에만 집착하게 만들고 새엄마를 자살로 몰고 갔을까.
이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피부에 닿으면 발진을 일으키고 많은 양을 접촉하면 생명도 위태로울 수 있으며 높은 기온에도 녹지 않는 눈은 우리 내면의 상처와 닮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아프고, 방치하면 생명도 위험할 수 있는, 어떠한 온도 변화에도 방해받지 않는 “내면의 상처” 말이다.
바쁘게 살아가느라 타인의 마음도, 자신의 마음도 헤아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내면에 깊이 박혀있는 상처를 외면하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상처받았던 순간을 그냥 덮어버리고 지나가면, 물비늘처럼 반짝이는 ‘녹지 않는 눈’ 위의 평화로운 모습처럼 다시 아무렇지 않게 생활을 이어갈 수 있으리라 가볍게 생각한다. 눈 아래에 온갖 시체들과 폐기물들이 들끓는 것처럼 내면의 상처가 나아지지 않고 누적되어 가는데도, 그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다. 그냥 물 흐르듯 시간이 지나면, 혹은 더 완벽해지거나 더 많은 부를 누리게 되면, 그런 상처들은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더 외적인 성공에 집착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월의 아빠와 새엄마도 사실은 겁이 많은 사람이었던 거다. 이월의 아빠가 새엄마의 자살을 사고사로 처리하려고 했던 것도 타인에게 받은 상처가 많아 안 좋은 평가가 너무나 두려웠던 것이었다. 하나, 둘씩 고장 나고 잃어가는 것이 삶일 수도 있는데, 그 이후에는 오히려 새로운 무언가를 얻을 수도 있는 게 삶인데, 완벽하지 않은 삶으로 인해 자살을 선택한 새엄마도 겁이 많았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월처럼 상처받은 사람을 알아보고 손을 내밀어주는 선택지보다는, 이월의 새엄마와 아빠처럼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받고 싶지 않아 ‘자신의 세계’ 안에 타인을 들이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택한다. 그렇게 우리들은 스노볼처럼 스스로의 세계에 갇힌 결과, 소중한 것을 잃게 되는 것이다.
나는 힘겨운 마음을 돌보는 것에 급급해 아빠의 내면을 바라볼 용기를 갖지 못했고 결국 아픈 아빠의 모습을 마주해야 했다. 이월의 아빠는 새엄마와 이월의 마음을 돌보지 못한 채 늘 자신의 명예에만 집착했으며, 이월의 새엄마는 더 이상 완벽하지 않은 삶을 이어가기 두려워 스스로 목숨을 버렸다.
그런 사람들의 두려움, 이기심이 모이고 모여, 스스로 외로운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에도 영향을 주었다. 눈 아래에 묻힌 온갖 폐기물처럼 수면 아래에 놓여있는 많은 문제점들을 직시하지 못해 현실에서 우리는 미세먼지와 코로나 19 대유행으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고, 소설 속에서는 ‘녹지 않는 눈’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좀 더 주변에 따뜻하게 다가가며 관심을 기울였다면, 그 마음으로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자 노력했다면, 상처받을까 봐 혹은 휘청거리는 세상이 두려워, 자신만을 위하겠다는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피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고 하더라도, 백영시를 특수 폐기물 매립 지역으로 선정했을 때 녹지 않는 눈뿐만이 아니라 온갖 쓰레기, 고위험 화학약품들, 죽은 짐승이나, 시체, 살아 있는 사람조차도 함께 버린 소설 속 인물들의 잃어버린 양심이 현실과 닮아있다는 걸 너무나도 잘 아는 한 사람으로서, 불가피한 요인보다는 외면이 일상화된 우리 스스로의 문제를 먼저 되짚어보고 싶었다.
가공할 쇠를 올려놓고 망치를 두드리는 받침대를 뜻하는 모루처럼, 어떤 시련에 부딪혀 흠집이 나더라도 그것을 무늬로 만들어 버릴 강한 마음이 우리에게 있었다면 이 소설을 읽는 내내 이렇게 반성하는 시간을 갖지 않아도 됐을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고백했던 것처럼, 이월의 아빠처럼 내가 단 한 번도 아빠의 내면을 알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던 이유는 두려워서였다. 아빠를 미워할 이유가 충분했으니까, 왜 힘든지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함께 고민하기보다는 나만 우뚝 서면 괜찮아질 거라고, 아빠의 내면을 알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합리화했다.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았던 내가 사회생활을 하고, 결혼을 하면서 뒤늦게나마 아빠에게 마음으로 다가갔다. 부모가 되면서 아빠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늦었던 것이었을까. 아빠에게 다가간 지 얼마 되지 않았던 2021년 7월 19일, 지난 수년간 늘 ‘미안하다, 사랑한다.‘고 말하며 내 세계 안으로 깊이 들어왔던 아빠는 영안실에서 평안한 모습으로 긴 여행을 떠났다. 아주 잠시 잠든 모습 같았던 아빠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제대로 살펴보았다. 세월의 흔적인 주름들이 고단한 생의 무게만큼 여기저기 스며들어 있었다.
예전에는 아빠만 생각하면 술과 담배 냄새가 내 몸을 휘감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그저 아빠의 웃는 모습만 선명하게 떠오른다. 버진로드에서 나를 바라봤던 아빠는, 이제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더 이상 나를 바라보지 않고 고요히 잠들었다.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울면서 외쳤던 그 순간이 이미 내 세계의 일부가 꺼져버린 후가 될 것이라는 걸 진작 알았다면, 몇 달 전부터 보고 싶다며 일주일에 한 번씩 영상 통화하자고 했던 아빠의 마음을 진작 헤아렸더라면, 단 1초라도 살아있을 때 아빠 얼굴을 직접 보고 손을 잡으며 사랑한다는 말을 전했을 텐데... 부끄러워서 늘 말끝을 흐렸던 ‘사랑한다.’는 한마디는 그렇게 뒤늦게 후회하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전하게 되었다. 소각장에서 갑작스러운 폭설을 피하지 못해 녹지 않는 눈을 맞으면서도 모루를 끝까지 놓지 않았던 이월의 모습처럼, 아빠를 다시는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또 아빠의 마음에 제대로 응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무척 괴롭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생각해 봤다. 모루가 센터에 지원하지 않았다면, 내가 더 일찍 단단한 벽을 뚫고 아빠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면 무엇이 달라졌을지.
그렇게 됐다면 이월을 돕다가 괴한에 쫓겨 이모가 행방불명될 일도, 그 사고 이후 이월이 계속 모루에게 진실을 전하는 것에 대해 망설일 일도, 애초에 모루가 이모를 수소문하며 찾을 일도 없지 않았을까. 내가 아빠에게 더 일찍 적극적으로 다가갔다면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전하지 못했던 스스로를 원망할 일도, 아빠가 내 곁으로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안 가져도 되지 않았을까.
거듭되는 고민에도 ‘세상에는 어찌할 수 없는 흐름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그저 휩쓸릴 뿐이므로, 지금 모루와 내가 느끼는 이 죄책감을 무늬 삼아 내 곁에 있는 가족들과 지인들에게 더 늦기 전에 다가가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소설 속에서도 모루의 엄마가 죽기 전에 모루에게 사랑한다고 말했고, 현실에서도 아빠는 눈을 감기 전에 우리에게 끝없이 ‘사랑한다, 미안하다.’고 말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듯, 가장 힘든 순간에 솔직해질 수 있는 용기, 타자의 내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 그리고 종내에는 내 곁에 남아있는 소중한 것들을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다짐들이 생겨나기에, 또 다른 후회를 낳지 않도록 이 다짐들을 지키고자 한다.
나와 모루에게 다가온 이러한 시련들은, 어쩌면 ‘신이 내린 선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16년 전에 쓰러져 고비를 넘겼던 아빠는 지난 수년간 가족들과 함께하면서 그의 진심을 끝없이 전했다. 마음을 존중받지 못해 술과 담배로 헛헛한 마음을 달랬던 아빠는, 가족들에게 뒤늦게나마 보살핌을 받으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원망만 가득했던 내 유년 시절도 회복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그렇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 소설 속 등장인물들 또한 ‘녹지 않는 눈’이라는 시련을 겪으면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나아갈 수 있었다. 자연재해로 인해 부르는 게 값인, 돈이 최고일 수도 있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지만 모루는 가장 소중한 존재인 이모를 끝까지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래서 더욱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간절한 내 마음을 조금씩 흘려 그들에게 가닿기를 기도했다. 이월은 모루의 간절함을 외면하지 않도록, 모루에겐 가장 소중한 존재인 이모를 꼭 찾도록, 이월의 아빠에겐 이월의 마음을 꼭 헤아릴 수 있도록, 이월의 새엄마에겐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죽는 그 순간에라도 알고 눈을 감을 수 있도록 말이다.
‘무’에서 ‘유’로 탄생하여 ‘흙’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여정은 그리 길지 않다. 그렇기에 소중한 것들을 마음에 품기에도 바쁜 시간이니까, 부디 소설 속 등장인물 모두가 소중한 것을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책을 덮고, 내 곁에 남은 엄마를 떠올려본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가 내게 '엄마!'라고 외치는 소리와 모습이 겹친다. 아이가 비눗방울을 만들기 위해 후~ 입김을 불었다. 순식간에 많은 비눗방울들이 넘실거리며 하늘 위에서 춤을 췄다. 동그랗고 투명한 세계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그 방울들 안에 소중한 것들이 하나둘씩 담긴다. 엄마, 오빠, 동생, 남편, 아이, 친구 등등. 방울들은 서로 부딪치며 톡 하고 터지기도 하고, 쌍둥이처럼 붙으며 더 멀리 날아가기도 했다.
우리의 세계도 이와 같다. 스노볼처럼 단단한 벽으로 우리 곁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비눗방울처럼 얇은 막으로 우리 세계를 지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누군가의 세계와 함께 붙어서 살아가기도 하고, 혹은 그 세계와 부딪치며 살아가기도 한다.
녹지 않는 눈에 묻혔던 이월의 새엄마가 비눗방울 안에 담겨있는 듯하다. 영원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간직하길 원했던 새엄마의 욕심이 사라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늘 가지고 다녔던 모루의 사진을 들고 모루가 찾아와 주길 기다리는 유진의 모습도 비눗방울에 담겼다. 그런 유진을 향해, 부릉부릉, 이월과 모루가 차를 끌고 찾아 나서는 모습도 비눗방울에 담겼다. 소중한 것을 위해 찾아 나서는 그 여정에는, 신이 내린 선물도 함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