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21
CA101.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1991)
이렌느 야곱을 보고 있노라면 자꾸 잉그리드 버그만이 생각난다. 제목의 우리말 번역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베로니카’―. 영화에서 이렌느 야곱이 1인 2역으로 맡은 배역은 폴란드의 베로니카와 프랑스의 베로니크다. 이 영화의 원제는 베로니카가 아니라 베로니크(Veronique)다. 그러니까 무게중심은 베로니카가 아니라 베로니크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또 하나는 ‘이중생활’―. 원제는 ‘Double Vie’이고, 영어로는 ‘Double Life’다. 그러니까 ‘Double’을 ‘이중’으로, ‘Vie(Life)’를 ‘생활’로 번역한 셈이다. 우리에게 ‘이중’이라는 말은 부정적인 뉘앙스가 강하다. 게다가 ‘이중’이라는 말에 ‘생활’이라는 말을 붙여놓았다. 그 바람에 이 영화의 제목에서 주인공 베로니카(베로니크)는 이중의 생활, 곧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부도덕한 생활을 하는 여인이라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 영화는 제목이 엉뚱한 선입견을 조장하여 영화에 대한 관객의 온전한 감상을 방해하는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로 남고 말았다. 이 탓에 서로 똑같이 생긴 이 두 캐릭터가 ‘도플갱어’라는 사실이 너무도 ‘적절히’ 감추어져 버렸다.
CA102. 미셸 공드리, 〈수면의 과학〉(2006)
꿈은 과학이다. 왜냐하면 현실이 그 꿈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인과관계가 명확한 것이다. 그러니 꿈에서 찾는 사랑은 현실에서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그가 꿈으로 자꾸만 도피하는 까닭이다. 꿈이 정말로 과학이라면 그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다.
CA103. 필립 가렐, 〈와일드 이노선스〉(2001)
스스로를 파우스트로 규정하고 용감하게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나서 자기 영혼을 팔 자신이 없는 사람은 영화 만들기를 포기해야 하리라, 어쩌면.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하는 과정에서는 감독이 망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는 배우가 어그러진다. 가장 불행한 사태는 만들어놓은 영화를 상영하는 동안 그 작품을 보는(또는 본) 관객이 망쳐지는 것이다. 그러니 영화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넘긴 자만이 할 수 있다. 미쳐야 미치는 것이다. 불광불급(不狂不及), 곧 미치지 않고서는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CA104. 데이비드 린치, 〈인랜드 엠파이어〉(2006)
3시간에서 딱 1분이 모자라는 러닝타임―. 데이비드 린치는 왜 이 지점에서 영화를 멈추었을까. 어쩌면 한국영화의 진정한 발전은 러닝타임 3시간짜리 상업영화가 나오기 전에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서글픈 자각―. 데이비드 린치의 영화를 ‘3시간-1분=2시간 59분’ 동안 계속 본다는 일의 어처구니없음을 생각해 본다면, 아무래도. 동시에, 그런데도 이 ‘3시간-1분’이 통째로 매혹의 덩어리라는 사실의 곱빼기 어처구니없음을 생각해 본다면, 역시.(물론 영화제 출품 버전은 197분이지만.)
CA105.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폭력의 역사>(2005)
비고 모르텐센의 무표정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무표정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바로 여기에 폭력의 비밀이 놓여 있다. 요컨대, 이 영화는 폭력의 ‘역사’가 아니라 폭력의 ‘비밀’에 관하여 언급하는 영화다. 한때 폭력이 밥벌이였던 사람들의 얼굴에는 왜 하나같이 표정이 없을까. 크로넨버그는 그 비밀을 만천하에 드러내 역사로 만들려 한다. 하지만 폭력은 역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비밀로 남아 있어야 한다. 역사가 되는 순간 폭력은 고찰이 아니라, 학습의 대상이 된다. 이것이 문제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인격적인 길항이 보는 사람을 긴장시키는 것은 바로 그 탓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또는 아버지의 폭력을 고찰은 할지언정 학습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