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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Sep 24. 2024

My Cinema Aphorism_20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20

CA96. 육상효, 〈3일의 휴가〉(2023)

   영혼인 어머니(김해숙)는 딸(신민아)과 만나면 천국에서 딸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는다는, 그러면 딸은 처음부터 숫제 ‘없었던’ 사람이 되는 셈이라는 마지막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딸과의 만남을 선택한다. 그것이 동시에 영원한 이별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어머니에게는 망설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 순간 딸보다 더 귀중한 것은 이 세상에서도, 저세상에서도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 어머니에게는. 이 대목에서 그 모녀에 대한 애틋함과 안타까움은 그 어머니도, 그 딸도 아닌 오직 관객의 몫이다. 어머니가 딸에게 이다음에 하늘나라에 오면 꼭 나를 찾으라는 당부의 편지를 남긴 것은 그 어머니를 위한 것도, 그 딸을 위한 것도 아닌, 바로 관객을 위한 조치요 배려다.


CA97. 낸시 마이어스, 〈인턴〉(2015)

   이 영화의 로버트 드 니로가 바로 〈세 가지 색 : 레드〉(1994, 크지쉬토프 키에슬로프스키)의 그, 장 루이 트랭티냥의 미국, 또는 미국화된 버전이 아닐까. 늙은 남자가 손녀뻘 여자의 스승이 되는 길에 관한 고찰. 그들은 전통적으로 현인(賢人)이라 불렸다. 그들은 어질고, 동시에 사람다워야 한다. 여기서 어질다는 말에는 현명하다는 뜻도 포함된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이는 거의 어려운 일이라고 보면 된다.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회사로 보면 로버트 드 니로가 인턴이지만, 인생으로 보면 앤 해서웨이가 인턴이다. 인턴은 일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배움이 목적이다. 이 영화의 주제가 일종의 ‘교육학’인 것은 그래서다.


CA97. 쿠엔틴 타란티노,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

   안 그래도 직업이 스턴트맨인 브래드 피트를 거의 초인처럼 그린 것은 실제로 있었던 비극적인 사건을 뒤집어놓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다. 원제를 포함하여 제목에 들어가 있는 말줄임표(...)는 바로 그 망설임, 또는 멋쩍음, 또는 어색함에 대한 은근하면서도 솔직한 표현이 아닌지. 현실에서는 어떤지 몰라도, ‘꿈의 공장’인 할리우드는 바로 그런 뒤집어놓기가 일상적으로 벌어져도 하등 이상하지 않은 곳이라는 새삼스러운 선언, 또는 남우세스러운 재확인.


CA98. 제임스 맨골드, 〈아이덴티티〉(2003)

   장 폴 사르트르, 존재와 무, 1986년, 대법원판결. 자신이 왜 사형을 당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죄수를 사형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 왜냐하면, 범인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면 그는 죄인으로서 죽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형은 어디까지나 죄인의 몫일진대, 분열된 정신, 분열된 주체로서 이중인격자는, 또는 다중인격자는 사형시킬 수 없다. 이 경우 문제가 되는 살인의 주체는 정신일까, 몸일까? 셰익스피어가 《베니스의 상인》에서 폈던 논리를 참조하면, 벌을 몸 또는 정신, 그 어느 쪽에 내려야 하는지를 결정할 수 없다는 딜레마가 생긴다. 살인을 저지른 자아와 벌을 받는 자아의 불일치라는 문제. 하지만 그 어느 한쪽의 자아가 이미 소멸되었다면, 게다가 그것이 의학적으로 증명되었다면, 형벌은 육체의 몫인가, 정신의 몫인가? 아니, 이 질문들은 과연 유의미한가?


CA99. 피터 패럴리, 〈그린 북〉(2018)

   그 시대, 천대받던 흑인과 ‘절반 흑인’인 이탈리아인의 동병상련 로드무비. 야만과 문명이 공존하는 과도기. 그러나 그 과도기는,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아직도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다. 최악의 핸디캡을 타고 난 사람들의 처절한 생존기. 이 생존기가 ‘불과’ 두 세대 전인 1960년대 문턱의 것이라는 사실이 기이한 낯섦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비고 모르텐센과 마허샬라 알리의 조합은 처절함과 낯섦 사이에서 그보다 더욱 기이하게도 유머러스한 기운을 빚어낸다. 아마도 이 유머러스함이 필연적인 진부함에서 이 영화를 살려낸 비결이 아닌지. 영화 속에서 트리오의 한 멤버가 한 말대로 천재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용기가 있어야 한다. 그 용기가 세상을 바꾼다. 바꾸려는 작용과 그걸 거부하는 반작용 사이의 길항이 만들어 내는 역사 속에서 어느 쪽에 서야 행복한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에 서는 것이 당위인지는 자명하다.


CA100. 강제규, 〈1947 보스톤〉(2023)

   영화가 ‘올드한’ 느낌이라는 지적은 의미 있는 평가일까, 단순한 인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올드한’이라는 꾸밈어가 긍정의 뉘앙스로 쓰였다면 그것은 스타일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고, 부정의 뉘앙스로 쓰였다면 그것은 연출 감각의 퇴조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강제규 감독의 경우, 〈1947 보스톤〉이 〈태극기 휘날리며〉(2004)와 〈마이 웨이〉(2011)의 연장선 위에 놓인 것이라고 본다면, ‘올드한’이라는 꾸밈어는 스타일을 지적하는 말에 더 가깝지 않을까. 또는, 그 ‘올드한’ 느낌과 색조의 시대에 대한 감독 특유의 기호(嗜好)를 가리키는 말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영화를 보는 관객의 처지에서는 ‘올드한’을 스타일을 가리키거나 규정하는 일종의 평어(評語)로 받아들일 때 영화가 더 명료하게 보인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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