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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Oct 01. 2024

My Cinema Aphorism_22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22

CA106. 고레다 히로카즈, 〈하나〉(2006)

   사무라이의 복수라는 말이 멋지게 들린다면, 그것은 사무라이도 한갓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복수에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가를 나열해 보여줌으로써 사무라이도 갈데없는 인간임을 여실하게 증명해 낸다. 복수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인내가 필요하고, 무엇보다도 양식(糧食)이 필요하다. 양식이 필요한 이상 돈을 벌어야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만 한다. 요컨대,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삶과 복수는 서로 상극이다. 마지막 순간 그는 이 사실을 깨달음으로써 사무라이의 자리에서 인간의 자리로 옮겨온다. 또는 내려온다. 〈황혼의 사무라이〉(2002, 야마다 요지)의 사무라이가 처음부터 자신이 인간임을 알고 있었다면, 이로써 〈하나〉의 사무라이는 바로 그 ‘황혼의 사무라이’의 출발점에 비로소 도달한 셈이다. 요컨대 〈하나〉는 〈황혼의 사무라이〉의, 연결 지점이 없는, 전편(前篇)이다.


CA107. 로베르토 베니니, 〈호랑이와 눈〉(2007)

   베니니의 사랑에는 왜 전쟁이, 또는 전쟁터가 필요한 것일까? 그의 사랑이 판타지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놓여 있다. 한데, 베니니의 판타지는 처음부터 그것이 판타지임을 알면서도 반하지 않을 수 없는 이상한 매력으로 사람을 휘어잡는 판타지다. 지뢰밭에 갇힌 그를 보면서도 우리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으로 똘똘 뭉쳐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을 지뢰 따위가 파괴할 수는 없는 일일 테니까.


CA108. 한스 카노사, 〈낯선 여인과의 하루〉(2005)

   러닝타임 내내 두 개로 분할된 화면을 보는 체험. 두 개의 화면, 두 개의 시선, 두 개의 입장, 두 개의 마음, 두 개의 발언, 두 개의 감정, 그러나 하나의 사랑―. 모든 것이 두 개지만, 사랑만은 하나라는 이 도저한 명제는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이 영화는 남녀를 정말로(!) 분할시킴으로써, 또는 남녀를 각각의 분할 화면 속에 가둠으로써, 또는 그렇게 분할하여 가두어놓은 광경을 보여줌으로써 둘 사이를 가르고 있는 칸막이가 무너져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이란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사랑을 이토록 시각적인 방식으로 강조한 영화를 나는 달리 알지 못한다.


CA109. 파스칼 페랭, 〈레이디 채털리〉(2006)

   레이디 채털리가 여신이 아니라 인간임을 보여준 영화. 그녀가 누구에게, 그러니까 어떤 남자에게 끌렸는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녀가 이제 비로소 인간이 되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랑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한 번 인간이 된 신은 결코 다시는 신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그것이 신들의 율법이기 때문이 아니라, 신의 매력이 인간의 매력에 못 미친다는 사실을 그 신이 신으로서, 아니, 인간으로서 마침내 깨달았기 때문이다.


CA110. 슈테판 크로머,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여름휴가〉(2006)

   원제는 그냥 ‘2004년 여름(Summer '04)’이다. 단순한 제목의 매력을 한국영화 시장에서는 참 맛보기 힘들다. ‘미필적 고의’라니, 얼마나 무도한가. 단순한 ‘역류’를 꼭 ‘분노의 역류’로 번역해야만 한국영화 시장에서 먹히리라는 식의 계산 밑에 깔린 관객의 수준에 대한 무시 또는 조롱. 이런 제목을 대하면 적어도 가끔은 정말로, 약간은, 자존심이 상한다. 에릭 로메의 〈여름 이야기〉(1996)에서 본 것과 같은 휴양지의 그 기이하게 매력적인 정서. 수십만 인파가 좁아터진 해변에 한꺼번에 몰려드는 북새통의 우리나라 여름휴가 풍경과는 너무도 다른. 요컨대, 지금 이대로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윌로 씨의 휴가〉(1953, 자크 타티) 같은 작품이 나오기 힘든 나라에서 내가 살아가고 있다는 씁쓸한 자각. 그래도 언젠가는 바뀌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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