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52
CA256. 이토 다이스케, 〈반역아(反逆兒)〉(1961)
그는 반역아가 아니다. 그를 반역아로 규정하려면 그의 할복이 반역의 의미를 지닌 행위여야 한다. 요컨대, 그가 오다 노부나가에 충성하려는 아버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을 받들어 할복을 시행하는 것 자체가 역설적으로 반역의 의미를 지닌 행위라는 해석. 그렇지 않다면 그는 한갓 순응자일 뿐이다. 어쩌면 사무라이들의 수많은 할복은 순응이 아니라, 반역이 아니었을까. 그들은 시대에 순응하는 척하면서 실은 반역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시대를 살아가느니 차라리 할복하는 편이 낫다는 자멸의 인식.
CA257. 야마나카 사다오, 〈백만 냥의 항아리〉(1935)
항아리를 둘러싼 모험? 항아리는 무엇인가? 이 항아리가 한 사람한테서 다음 사람한테로 넘어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이야기의 전개 과정에 대응한다. 항아리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구실을 하며, 동시에 그 주변으로 사람을 끌어모으는 구실도 한다는 것. 모든 이야기는 항아리와 얽혀 있으며, 결국은 항아리가 있는 자리에서 영화는 끝난다. 사건은 해결된 것이 아니다. 단지 항아리라는 존재를 통해 인간군상의 사연들이 펼쳐졌을 뿐이다. 탐욕이 주제인 것도 아니다. 항아리 주변에 얽혀드는 인간의 이야기들이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우스꽝스러운가가 중요하다. 1930년대 일본 희극영화의 위력을 알 수 있는 작품. 〈정무문〉(1973, 나유)의 도장 결투 장면, 〈거미집의 성〉(1957, 구로사와 아키라)의 화살 난사 장면의 원형이 이 영화에 놓여 있다. 외팔이에 애꾸눈 사무라이 캐릭터는 뒷날 장철과 왕우의 외팔이 검객 시리즈의 원전이 아닌지. 그 영향 관계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추측. 그리고 우스꽝스러우나 촌철살인의 대사 한마디. “의사란 사람이 아파야만 먹고사는 직업인데, 그게 뭐가 좋다고……”
CA258. 오시마 나기사, 〈백주의 살인마〉(1966)
대낮에 걸어 다니는 악마. 그가 악마가 된 과정과 그가 악마로서 연쇄살인을 벌였다는 사실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그의 악마성이 인간에게는 잠재되어 있으며, 서로 다른 계기로 작동되기 시작하면 누구든 그 순간부터 ‘걸어 다니는 악마’가 된다는 전언이 중요하다. 한 마디로 속절없이 백주의 살인마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를 다루면서조차 이상적인 농촌공동체 건설이라는 운동 목표 아래 모인 하나의 집단을 끌어들인 것은 항상 사회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는 오시마 나기사다운 처사. 일반 영화보다 훨씬 많은 2천 컷이 필요했던 것은 편집에 대한 감독의 새로운 실험 의도의 결과.
CA259. 라스 폰 트리에, 〈범죄의 요소〉(1984)
기억을 되찾고 보니 그것이 악몽이었다면, 역시 급선무는 거기서 빨리 깨어나는 것 아닐까. 그리고 깨어난다는 것은 그 악몽에서 해방된다는 뜻이다. 물론 그 뒤로 그가 정말 해방이 될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것 자체다. 왜냐하면 그것이 악몽이기 때문. 행복한 기억이라면 영원히 깨어나고 싶지 않을 테니까. 그래서 그는 이제 그만 깨워달라고 최면술사한테 부탁한다. 이것도 이상하다. 그렇다면 스스로 최면이 된 상태를 의식하고 있다는 뜻인데, 그는 완벽히 최면된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CA260. 신도 가네토, 〈벌거벗은 섬〉(1960)
무성영화는 아니면서, 대사가 없는 영화. 진짜로! 그런데도 영화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전혀 없다는 것이 신기하다. 다큐멘터리의 눈으로 한 부부가 노동하는 일상을 꼼꼼하고 끈질기게 관찰하는 카메라의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한 인간의 노동 그 자체의 신성함이 가슴을 뻐근하게 채우고 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