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Cinema Aphorism_70

- 나만의 영화 잡설(雜說)_70

by 김정수

CA346. 에르만노 올미, 〈직업 군인〉(2000)

조반니 데 메디치는 최신형 대포알에 맞아 생긴 상처가 악화되어 목숨을 잃었다. 이 영화는 잔혹한 살상 무기에 대한 인간의 콤플렉스를 역사와 종교의 맥락에서 언급한다. 총을 처음 개발한 자는 단지 맹수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겠다는 목적의식밖에 없었지만, 인간은 그것을 전쟁에 무기로 이용했다. 당연한 현상이다. 인간의 역사는 필요에 떠밀린 발명과 그 발명품에 대한 악용의 역사다. 잔혹한 살상 무기의 사용금지 칙령 따위가 무슨 소용일까. 한 인간의 생명이 스러져가는 현장에서 그 칙령은 한없이 무용하고 무력하다.


CA347. 박찬옥, 〈질투는 나의 힘〉(2002)

질투가 삶의 가장 강력한 동력이라는 도저한 선언. 질투마저 없다면 그가 살아 있다는 증거를 찾을 길이 막연하다. 의심이 아니라 질투가 인간이 존재함의 근거요 증거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사람들끼리의, 또는 선하기도 악하기도 한 사람들끼리의 담합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여실한 통찰.


CA348. 임권택, 〈짝코〉(1980)

영화는 그들의, 짝코(김희라)의 비참한 최후를 장송한다. 그들은 고향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최후를 맞는다. 결국 살아서 고향에 가지 못하는 것이다. 이 설정이 의미심장하다. 한데, 이것을 가리켜 ‘실향(失鄕)’이라고 부르는 것이 온당한가.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사태를 어째서 ‘失(잃을 실)’자로 표현하는 것일까.


CA349. 카트린느 브레이야, 〈짧은 횡단〉(2001)

그는 18살도 채 되지 않은 미성년이다. 그가 처음 배에 오를 때 검색대에서 신분증 검사에 애를 먹는 상황을 설정해 둔 것은 바로 이 점을 강조하려는 조치다. 요컨대 이 영화는 여자에 대한 남자의 저 ‘낯익은’ 수작이 아니라, 나이 든 성인 여자가 어린 미성년 사내아이를 손에 넣는, 또는 농락하는 이야기다. 이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적어도 어느 만큼은 전복적이다.


CA350. 잉그마르 베르히만, 〈처녀의 샘〉(1960)

그 ‘처녀’가 떠돌이 양치기들한테 당한 강간과 살해는 하필이면 어쩌다 그 ‘처녀’가 게으르게 늦잠을 자 제때 예배에 참석하지 못한 날에 벌어진 일이다. 그렇다면, 이 점에서는 그녀도 분명한 죄인일까. 그녀의 아버지는 신앙심이 깊지만, 그 신앙이 정말 ‘온전하게 바른’ 것인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마침내 딸의 복수를 잔혹하게 끝낸 아버지는 딸이 숨진 바로 그 자리에 성당을 지어 세울 것을 맹세한다. 이것은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행위일까, 신에게 감사하는 행위일까. 아니면, 나아가 신을 찬양하는 행위일까. 그리고 기적처럼 딸의 시체가 놓여 있던 자리에서는 샘이 터져 나온다. 그렇다면 이 이상하고도 신비로운 물의 이미지는 문자 그대로 ‘죄 사함’의 세례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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