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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Jun 13. 2024

8. 기연물부도 노력가찬반

  - 그대 기운 내서 잘 지내야 해요 / (〈고시십구수〉의 제1수)

8. 그대 기운 내서 잘 지내야 해요 / 棄捐勿復道(기연물부도) 努力加餐飯(노력가찬반)(〈古詩十九首(고시십구수)〉의 제1수)

   이 마지막 구는 온전히 번역해 놓고 보면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내용, 또는 의미임을 금세 알아차릴 수 있지만, 번역이 만만치 않습니다.

   맨 앞의 ‘棄捐(기연)’부터가 그렇습니다.

   이는 ‘버릴 기(棄)’자와 ‘버릴 연(捐)’자로 이루어져 있으니, 우선은 앞서 언급했던 저 같은 의미의 글자 두 개를 나란히 겹쳐 쓴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그냥 ‘버리다’ 정도로 해석하면 크게 무리는 없겠습니다.

   하지만 바로 뒤의 세 글자와 합하여 번역하려면 의미 맥락을 조심스럽게 따져보아야 합니다.

   물론 이 ‘기연(棄捐)’ 자체는 국어사전에 버젓이 올라 있는 단어로서, 두 가지 정도 의미로 풀이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글자 그대로 ‘내어 버리다’라는 의미고, 또 하나는 ‘자기의 재물을 내어서 남을 도와주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두 번째 의미로는 ‘자선이나 공익을 위해 금전이나 물품을 낸다’라는 의미의 단어인 ‘의연(義捐)’과 비슷한 말입니다. 이 ‘의연’은 우리에게 ‘수재의연금(水災義捐金)’이라는 말에 들어 있는 단어로 익숙하지요.

   물론 그렇다고 이 마지막 구에서 ‘기연’을 ‘의연’과 같은 뜻으로 보기에는, 앞뒤 의미 맥락을 따질 때 아무래도 어렵겠습니다.

   따라서 ‘棄捐(기연)’을 ‘버리다’라는 의미의 타동사로 보면, 뒤의 ‘勿復道(물부도)’는 목적어로 명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 구를 ‘~을(를) 버리다’라는 식으로 번역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곧, 여기서 ‘~’에 해당하는 말이 ‘물부도’인 셈이지요.

   따라서 전체는 ‘물부도를 버리다’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물부도’는 어떻게 번역해야 할까요?

   한 글자 한 글자 따져보면, 맨 앞의 ‘말 물(勿)’자는 달리 문제가 없는데, 뒤의 두 글자는 조금 주의해야 합니다. 두 글자 모두 음이나 뜻이 한 가지가 아니니까요.

   우선 맨 뒤의 ‘道(도)’자는 기본 의미가 명사로 ‘길’이지만, 한문 문장에서는 동사인 ‘말하다’라는 의미로 제법 많이 쓰인다는 것을 알아두면 좋습니다.

   ‘勿(물)’자와 ‘道(도)’자 사이에 놓인 글자(復)는 부사인 ‘다시’라는 뜻일 때는 ‘부’로 읽고, 동사인 ‘회복하다’라는 뜻일 때는 ‘복’으로 읽습니다. 따라서 여러 조합이 있을 수 있겠지요.

   우선 ‘道(도)’가 명사인 ‘길’의 의미일 경우 그 앞에는 부사가 올 수 없으므로 동사인 ‘회복할 복(復)’이 와야 합니다. 따라서 ‘복도’가 되어 ‘길을 회복하다’가 됩니다.

   한데, 여기에 ‘勿(물)’자까지 합하여 번역하면 ‘길을 회복하지 마라’가 됩니다. 이러면 아무래도 의미가 이상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道(도)’는 ‘말하다’라는 의미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동사인 ‘道(도)’자 앞에 오는 글자도 같은 동사인 ‘회복할 복(復)’자가 아니라, 부사인 ‘다시 부(復)’라야 어울리겠지요. 그래서 전체는 ‘다시 말하지 마라’가 되어 비로소 뭔가 뜻이 통하는 느낌입니다.

   이제 ‘棄捐(기연)’과 ‘勿復道(물부도)’를 합하여 번역하는 일이 남았네요.

   앞서 ‘기연’이 ‘버리다’라는 의미라고 했으니, 이는 동사입니다.

   한데, ‘물부도’도 ‘다시 말하지 마라’라고 했으니, 역시 동사(술어)입니다.

   그렇다면 어느 한쪽을 목적어에 해당하는 명사로 만들어야 문법에 맞는 문장이 되지 않겠습니까. 한문에서는 품사의 통용이 널리 허용된다는 것은 앞서 제가 다른 글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지요.

   하지만 ‘물부도’를 명사화시켜서 ‘다시 말하지 말 것’ 또는 ‘다시 말하지 않을 것’ 정도로 하면 ‘다시 말하지 말 것을 버려라’나 ‘다시 말하지 않을 것을 버려라’가 되어 뜻이 통하지 않는 이상한 문장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앞의 ‘기연’을 명사화시켜야 말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이렇게 됩니다.

   ‘버릴 것을 다시 말하지 마라.’

   이제야 비로소 뭔가 뜻이 통하는 느낌이 듭니다.

   하지만 우리말 문장으로는 여전히 어딘가 요령부득으로 어색합니다. 이 문장이 어색한 것은 앞의 ‘버릴 것을’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이 시구의 앞부분 전체에서 시적 화자가 계속 견지하고 있는 마음의 태도는 서로 멀리 떨어져 그 생사 여부를 알 수 없는 그대(君)에 대한 근심 걱정과 그리움, 그리고 원망과 한탄 아닙니까. 따라서 그 마음의 태도를 감안하여 이 ‘棄捐(기연)’을 이해해야 합니다.

   더불어, 이쯤에서 한문에서는 품사의 통용도 허용되지만, 동시에 능동태와 수동태의 통용도 허용된다는 것 또한 알아둘 필요가 있다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겠네요.

   그러니까 ‘버릴 것을’을 수동태로 표현하면 시적 화자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가 조금 더 분명해집니다. 그럼 ‘버림받을 것을’ 정도가 됩니다.

   그렇다고 ‘버림받을 것을 다시 말하지 마라’라고 하면 이것도 어색한 문장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버림받았다고 다시 말하지 마라’ 또는 ‘버려졌다고 다시 말하지 마라’ 정도로 번역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시적 화자는 멀리 떨어져 있는 그대(君)한테 “우리가 서로 생사의 여부조차 알 수 없다고 해서 내가 그대를 버렸다고 생각하지는 마라”라고 그대에게 위로 또는 격려의 말을 건네고 있는 것입니다. 곧, 나의 마음은 변치 않았으니, 그대는 아무 걱정 하지 말라는 의미겠지요.

   실은 시적 화자 자신이야말로 그대(君)한테서 버림받았다고 생각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는데, 오히려 시적 화자 쪽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그대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형국인 셈입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시적 화자는 그대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로 오히려 스스로를 위로하며 격려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편이 시적 화자의 본마음, 또는 속마음에 대한 더 정확한 이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이 위로와 격려의 말이 그대(君)한테 가 닿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니까요. 그도 그럴 것이, 이 위로와 격려가 물리적으로는 어디까지나 공허한 메아리일 수밖에 없는 상황 아니겠습니까.

   이 앞 구를 이렇게 위로나 격려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뒤의 구인 ‘努力加餐飯(노력가찬반)’ 때문이기도 합니다.

   맨 앞의 ‘힘쓸 노(努)’자와 ‘힘 력(力)’자로 이루어진 ‘努力(노력)’은 ‘힘을 쓰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지금도 널리 쓰이는 말이니까 그냥 ‘노력’ 또는 ‘노력하다’라고 해도 별문제는 없겠습니다.

   뒤의 ‘餐飯(찬반)’은 동사인 ‘먹을 찬(餐)’과 명사인 ‘밥 반(飯)’으로 이루어진 단어니까 그냥 ‘밥을 먹다’라고 하면 되겠고요.

   문제는 가운데 끼인 ‘더할 가(加)’자입니다.

   순서대로 번역하면 이 구 전체는 ‘노력이 찬반에 더해지다’ 정도의 모양새가 됩니다. 역시 어색하지요? 한문 문장에서는 동사와 명사의 순서를 바꾸어서 쓰는 경우도 많으니까, 이 경우도 ‘加努力(가노력)’으로 보아서 ‘노력을 더하다’라고 번역하면 뜻이 잘 통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구 전체를 번역하면 이렇게 되겠지요.

   ‘찬반에 노력을 더하다.’

   ‘찬반’은 ‘밥을 먹다’니까 다시 번역하면 이렇게 되겠지요.

   ‘밥을 먹기에 노력을 더하다.’

   이제야 어느 정도 의미가 잡히는 느낌이지요?

   그렇습니다. 결국 지금 시적 화자는 이 구에서 그대를 향해 ‘그대가 나를 그리워하고 걱정하느라고 지금 밥도 제대로 못 먹어 수척해져 있을 것 같은데, 그대에 대한 내 마음은 변치 않았으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고 어서 힘을 내어 삼시세끼 빠뜨림 없이 끼니 잘 챙겨 먹고 기운 차려서 잘 지내라’라고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의 번역은 결국 ‘기운 내서 밥 먹어라’ 정도로 하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렇게 뒤의 구가 그대를 격려하는 말이니까 앞의 구도 이에 맞추어 위로와 격려의 의미로, ‘버려졌다고 다시 말하지 마라’가 되는 것입니다.

   이제 앞의 구와 뒤의 구를 합하여 전체 문장을 정리하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버려졌다고 다시 말하지 말고, 기운 내서 밥 먹어라.’

   여기서 ‘다시’를 ‘자꾸’로 바꾸면 조금 더 세련된 느낌일 것 같습니다. 그러면 최종적으로 이렇게 되겠네요.

   ‘버려졌다고 자꾸 말하지 말고, 기운 내서 밥을 먹어라.

   그대를 걱정하는 시적 화자의 진심이 선연하게 드러나는 지점입니다.

   지금껏 줄기차게 그대(君)에 대한 그리움과 걱정 근심, 그리고 나아가 원망과 한탄의 심경까지 토로하던 시적 화자였지만, 그래도 가슴속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본마음은 그대에 대한 걱정이었음을 더는 숨기지 못한 것입니다.

   이 깊고 넉넉한 사랑, 참 눈물겹지요? 절창입니다. 변심(變心) 따위는 그야말로 언감생심(焉敢生心)이지요.

   앞서 나왔던 모든 표현이 결국은 시적 화자 자신의 실존적인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었음이 마침내 여기에서 분명해졌습니다.

   이제 다음의 남은 두 글에서 차례로 전체 번역문을 정리하고, 앞서 제기했던 의문과 문제 제기에 대하여 적절한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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