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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미 Oct 15. 2024

별걸 다 시키시네요.

생각없는 말로 천 냥 빚 못 갚는다.

별걸 다 시키시네요.

생각 없이 말이 먼저 나와버렸다. 순간 아차 했다. 되돌리기 버튼은 없다. 웃기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웃을 수도 없는 말이다. 상대를 무안하게 할 뿐이었다.     


대여섯 명쯤 모여 강의를 듣는 자리였다. 강사님이 강의안을 미리 준비해서 나눠주셨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본문 앞부분에 인용된 '시'를 읽어달라고 부탁하셨다. 강사님이 나를 콕 찍어 지목하셨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첫 타자가 되어서 당황스러웠던 걸까. 부끄러운 마음이 이런 식으로 표현될 줄이야.


"별걸 다 시키시네요."


읽기 싫은 게 아니었다. 부정적인 반감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 말은 완전히 다르게 나갔다. 필터링 없이 엎질러진 말에 강사님은 기분이 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말을 내뱉고는 순간 정신이 들고, 무마시키려고 멋쩍은 웃음을 짓고는 수습하듯 바삐 해당 본문을 읽어내려갔다. 다행히 다른 몇 분의 억지 웃음소리 덕분에 싸해질 뻔한 분위기가 전환되었다. 강의는 계속되었다.  

  


그저 강사님 말씀대로 맞춰 읽으면 될 걸. 나는 왜 굳이 맘에도 없는 말을 했을까? 후회가 켜켜이 쌓인다. 마음이 불편하다. 강사님께 제대로 '죄송하다'라는 말씀을 드리지 못했다. 다시 얘기를 꺼낼 용기가 안 나고, 다른 실수를 할까 봐 겁나기도 하고. 생각 없이 던져진 가벼운 말 한마디가 무게감 없이 지나갔기를 바랄 뿐이다

    

정말이지 말이 너무 서툴다 못해 어눌하다. 옹알이도 이것보단 낫겠다.


유창함은커녕 상황에 맞지 않는 말로 분위기를 냉랭하게 식혀버린다. 의도치 않게 틱틱거리거나, 은근 다른 사람을 까는 말을 뱉기도 한다. 초면에 어색하면 뚝딱거림이 더 심해지기도 하고.


입에 재갈을 물려야 하나?

일단은 멈춤이 필요할 듯하다. 지금 상황에선 그냥 버퍼링이 걸리거나 침묵이 훨씬 나을 테니까. 시간이 걸리더라도 생각하고 말하기 연습이 시급하다. 입에서 바로 나오는 말은 위험하다. 수습이 안 된다. 머리에서 입력하고, 입으로 출력하는 출입구를 구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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