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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미 Oct 21. 2024

내민 손이 멋쩍어질 때

'줍줍 심보'로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안녕하세요

제가 일이 생겨서 저희남편이 대신 나갑니다 

주황색쇼핑백 들고나갑니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는데 당근 톡이 와 있었다. 남편분이 어디 있을까 둘러보는데 주황색 가방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중년 남성분이 들고 계신다. 나눔 받을 물건이 ‘어메리칸 이글 청 셔츠’라서 중년분이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었다. 


“안녕하세요. 오늘 당근 나눔 해 주신다고 해서요….”

“청, 청 옷 말이요?”

“네, 청남방이요. 감사합니다. 잘 입겠습니다.”


번지수를 제대로 찾고는 손을 내밀었다. 주황색 종이가방이 건너오기 전까지 내 손은 혼자 허공에 떠 있는 상태였다. 그 순간 민망함이 몰려왔다. 주먹을 쥘 수도 없고. 다른 때라면 음료수라도 쥐고 있었을 텐데 오늘은 바삐 나온다고 그마저도 없었다. 연거푸 감사하다고 인사하고는 자리를 빠져나왔다. 30초도 안 되는 시간이 30분 같았다.


‘줍줍 심보’ 때문에 당근상점에 죽치고 있습니다 

주워도 주워도 끝이 없다. 고마운 당근 이웃분들은 번갈아 가며 거저나 다름없는 가격에 물건을 던져주신다. 


‘옜다’

‘앗싸’     



생각해 보면 지금만 그런 건 아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맞다. 어릴 때도 나는 줍는 사람이었다. 빈 병을 주워서 용돈을 모았다. 그걸로 리코더를 산 기억이 있다. 넙데데한 썬키스트 병을 발견하면 그렇게나 기분이 좋을 수 없다. 소주병이나 맥주병이 십 원, 오십 원 할 때 썬키스트는 백 원이었다.  


강구야! 

고무 딱지, 종이 딱지를 엄청 많이 모은 대장님 친구가 통 크게 기부하는 소리였다. 딱지 부자가 선심 쓰듯 수십 장의 딱지 뭉텅이를 하늘 위로 날리면 아이들이 우르르 모여들었다. 내정자는 없다. 줍는 사람이 임자란다. 너도나도 제 것 하려고 정신없이 주워댔다. 물론 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 후에도 나는 딱지 대장님 앞을 괜스레 어슬렁거렸다.


예전에는 길바닥에 떨어진 돈도 꽤 있었다. 지금은 돈 주울 일이 없다. 암만 땅바닥을 보아도 10원짜리 동전 하나 눈에 띄지 않는다. 현금 없이도 살아가는 세상이라 돈을 흘릴 일이 없으니까. 그 덕에 시험에 빠지지 않아 좋긴 하다. 떨어진 돈이나 지갑을 발견하면 몰래카메라라도 있는 듯 슬쩍 주위를 살핀다. 잃어버린 사람만큼 마음이 콩닥거린다. 노다지를 발견한 듯 실실 웃음이 나오다가도 이내 고민에 빠진다. 내 것이라면 자연스레 다시 집어넣겠지만 엄연히 남의 것이다. 애타게 찾을 주인의 마음이 그려져서 그냥 그대로 두고, 지나친다. 자리를 뜨고도 아쉬운 마음은 떠날 줄을 모른다. 

    

요즘엔 그런 갈등이나 고민 없이, 떳떳하게 돈을 줍고 있다. 핸드폰에 돈이 널렸다. 포인트, 캐시, 적립금, 페이머니, 코인 등 여러 가지로 불리는 것들이다. 걸어가든지 눕든지 앉든지 손에서 핸드폰이 떠나질 않는다. 1원이요 2원이요 주판 튕기듯 손가락으로 눌러 푼돈을 차곡차곡 쌓는다. 걸음 수와 연계된 포인트를 위해서 핸드폰을 가볍게 흔드는 것도 빼먹지 않는다. 맘 편하게 남의 돈 줍는 기분이다.     

 

그렇게나 나는 공짜를 좋아한다. 코 묻은 푼돈에 기분이 널을 뛴다. 쌓여가는 적립금에 기분이 한없이 좋아졌다가도 500원짜리 할인쿠폰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황엔 기분이 잡친다.     


나는 '줍는 사람'이자 ‘받는 사람’이다. 어딜 가든, 언제나 ‘수혜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당근 상점에서 홀라당 드러나 버렸다. 조금 머쓱하고, 부끄럽다.      


체면치레로 어렵게 나눔을 시작해 봤다. 암암리에, 쥐도 새도 모르게 말이다. 

우선 잘 팔리지 않았던 물건의 가격을 내려 ‘0’ 원으로 만들었다. ‘끌어올리기’는 하지 않았다. ‘나눔 물건’이라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나 같은 사람이 꼬이지 않았으면 했기에. 이 물건이 진짜 필요한 사람을 찾고 싶었다. 불특정 다수는 피했는데, 찐 주인도 나타나지 않는다. 고대로 있다. 이번엔 좀 다르게 해 보았다. 새로운 물건을 올리면서 ‘가격 없음’으로 설정했는데 이것 역시 ‘나눔’으로 노출이 안 되나 보다. 문의가 한 개도 없다. 그런 비공식적 나눔이 여섯 가지가 된다누가 들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들릴 둥 말 둥 속닥거렸는데 진짜 아무도 듣지 못했나 보다. 나눔 물건이 좋지도 않은데도 왜 이리 생색을 내는지. 조만간 나눔 물건을 ‘끌어올리기’를 해서 공개할 생각이다. 아마 그때는 제대로 사태 파악이 되겠지.    

 


매번 받으려고 내민 손이 닳아버린 기분이다. 민망해서 뭐라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적 '강구야'라고 외치며 딱지를 날리던 대장님처럼 될 수 있을까? 당근 상점에서 '당근이야'라고 소리치며 조건 달지 않고, 넉넉하게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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