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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미 Jul 23. 2024

문지르면 뭐가 되는데?

세상에 거저 되는 건 없다.

문지르고 문지른다.

또 문지른다. 

나무판자에 사포질하는 중이다.


단순 작업이라 생각 비워내기에 좋을 텐데, 머릿속이 더 복잡해진다. 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가는 톱밥에 생각도 쌓여갔다. 기관지가 걱정된다.

‘미세먼지 몸에 해롭다고 난린데 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루는 과연 괜찮을까?’     


요술 램프라면 ‘지니’를 기다리는 마음에 마냥 문지를 텐데 이건 아무 일도 안 생긴다.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지?’ 

몇 번을 혼자 되물었다.

사포질을 멈추고, 판때기에 묻은 톱밥을 쓸어내리며 몇 번을 문질문질 해본다. 벌써 다 된 느낌이다.      



지난 토요일, ‘원데이 도마 만들기 체험 교실’에 참여했다. 말은 거창하게 들려도 과정은 간단했다. 준비된 나무판자를 원하는 모양으로 자르고, 표면을 사포로 문질러서 매끈하게 하고, 기름을 쓱싹 바르면 끝이다. 재단이나 기름칠은 선생님이 해주셨으니 수강생이 할 일은 문대는 거다. 전체 시간 90분 정도의 8할을 사포질로 썼다. 

    

도마 재료로 받은 나무판은 이미 훌륭했다. 반제품이나 다름없었다. 이천 어느 업체에서 전문가분이 뒤틀림이나 썩음 방지 처리를 한 상태로 상판 표면은 매우 고왔다. 미끄덩한 얼굴에 흠집 낼까 조심스러웠다. 괜히 손댔다가 긁어 부스럼 내기 딱 좋아 보였다. 특히 나 같은 똥손 부류는 섣부르게 덤벼들었다가 일을 그르치기 일쑤다. 뒤로 빠져있는 게 상책이었다. 잠시 눈치 보다가 선생님 지시에 잘라나간 옆면을 거친 사포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문지르고, 또 문지르고. 

again and again. 

keep ~ing 계속~~하다.  뜬금없이 영어 숙어가 떠올랐다. 여기에 딱 맞는 표현이긴 하다.


대충 분위기 봐서 마무리해야겠다 했는데 둘러보니 정말 열심이다. 모두 문지른다고 정신없다. 자기 도마, 자기 사포질에만 오롯이 매달려 있다. 

     

도마에서 눈을 떼는 사람은 나뿐이다. 쉬엄쉬엄, 어슬렁어슬렁하는 사람도 나밖에 없다. 나는 ‘언제까지 문지를까요?’ 물어보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한데 다들 원체 요동이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강의실 내 사람들은 한결같이 같은 동작을 계속한다.     


어릴 때 대중목욕탕에서 내 등을 밀어주던 엄마가 생각났다. 소금물에 배추 절이듯 온탕에서 한참 몸을 불리고 나면 나른해지고, 축축 처진다. 그런데도 엄마는 여전히 넘치는 파이팅으로 열심이었다. 한 오라기 때도 넘어가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박박 문질러댔다. 여기 있는 사람들 세신사 요건을 충분히 갖춘 듯하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을 정도’의 시간이 지났다. 체감상 그렇다. 엄청 더디게 가는 걸 보니 그만큼 지루했나 보다. 그동안 사람들은 도마가 마르고 닳을 정도로 엄청난 사포질을 해댔다. 나는 분위기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몇백 번의 사포질을 더 했다.  


   

드디어 기름칠하고 마무리를 한단다. 

불도장을 찍고, 기름을 발라 주시는 선생님 앞으로, 일렬로 줄을 섰다. 



유난히 윤이 나는 도마가 멀찍이 보인다.


만져보지 않고, 눈으로만 봐도 얼마나 매끈한지 광이 난다. 고래 형상을 본 따 만든 도마였는데 빤질빤질한 고래의 피부를 보는 듯했다. 아들을 낳고 싶은 마음에 사람들이 하도 문질러서 만질만질해진 제주도 돌하르방의 코가 저럴거다. 어지간히 문지르셨나 보다. 애정을 엄청나게 쏟아부은 게 보인다. 바지런한 손놀림이 짐작 간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더니 열심과 집념이 도마에 고스란히 배어 나왔다.  

    

겉으로 보기에 대충대충 문지른 내 것도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았다. 기름칠까지 하니 그럴싸하다. 은은한 편백 향이 좋아서 바로 쓰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확실히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따라갈 수가 없었다. 비슷한 편백 널빤지로 같이 시작해도 묻어나오는 결이 저마다 달라진다. 손때가 묻고, 애씀이 묻는다. 그사이 깊어지고, 묵직해진다.     


몇 번의 사포질로는 티가 나지 않는다. 하나 마나 한 기분이라 바보 같다. 괜한 수고란 생각에 그마저 그만두게 되면 아무것도 못 건진다. 과정을 거쳐서 결실이 생기고, 내공이 생기려면 그만한 노력과 수고가 뒤따라야 한다는 당연한 이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거저먹고, 쉽게 얻고, 금방 호로록 누리길 좋아했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걸 자꾸 잊어버린다. 

단번에 되는 건 없다. 들어간 게 있어야 나오는 게 있다.

(단, 로또는 제외.  로또 대박 맞을 확률이 벼락 맞을 확률과 맞먹는다니 이 역시 쉬운 건 아니다)      


단번에 끝장내려는 성급함은 잠시 내려놓아야겠다. 

‘무늬만 도마’에서 깊이감 있는 묵직한 ‘진짜 도마’로 갈고 닦으며 견디어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지루한 사포질도 묵묵히 하다 보면
자연스레 내공이 쌓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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