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홑작약 겹작약 구분하기

순도 백 도시인의 시골살이

by 박수미
아빠는 몰랐다.

진짜 몰랐을 거다. 시골의 겨울이 얼마나 황량한지. 알았다면 감히 그런 일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겠지.


순진한 아빠는 12월 어느 겨울날 여주 땅으로 엄마를 데리고 갔다. 도시에 있겠다고 버티던 엄마가 결국 항복하고, 끌려 내려오다시피 시골살이가 시작되었다.


수확기가 한참 지난 겨울이라 아무것도 없었다. 주변에 열 가구 남짓한 집, 지나가던 사람이 반가울 정도로 인적이 드문 동네였다. 매서운 바람에 몸이 움츠러들고, 앙상한 나뭇가지마냥 마음이 쪼그라들었다.


아빠도 적지 않게 당황한 모양이나 티를 안 내는 듯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림이니까 말이다. 본인 주도하에 강행한 시골행이라 핑계 댈 것도, 하소연할 데도 없었다.


사실 이 집을 보러 올 때만 해도 이렇지는 않았다. 시골 내음이 가득 나는 전형적인 ‘농가’였고, 생기가 넘쳤다. 늦깎이 여름철 어느 날이라 짙어질 대로 짙어진 녹음에 혈색이 돌았다. 집 뒤에는 나지막한 산이 떡 버티고 있어서 든든했다. 집 앞 텃밭은 채소 가게나 다름없었다. 가게에서 봉지봉지 담긴 채소가 여기엔 생으로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여기 살던 집주인 내외분은 정말 바지런했단다. 퇴직 후 전원생활을 꿈꾸며 시골로 내려가는 부모님과는 정반대였다. 아저씨네가 개미라면 우리는 베짱이였다.듣자 하니 아저씨는 시골형 워커홀릭 같았다. 주중에는 택시 운전사로, 주말에는 이 집 관리인으로 열심히 일하셨단다. 아저씨는 여기를 사람이 살 만 하도록 구색을 갖췄다. 비가 내리쳐서 뒷산에서 흙이 떠내려와 흙탕물이 넘치자 수로를 내고, 돌로 외벽 축대를 든든히 쌓아 방어막을 세웠다. 아파트 생활만 했던 우리 식구는 그때만해도 시골 주택살이가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지 짐작조차 못했다. 아주머니 역시 쉴 틈 없이 일하시긴 마찬가지였다. 텃밭에 욕심이 많았던지 옆 산, 뒷산, 돌밭 할 것 없이 가리지 않고 일궈서 온갖 작물을 키워냈다. 두 분의 부지런한 손길 덕분에 집 주변에는 갖가지 과일나무며 채소가 종류별로 심겨 있었다. 없는 게 뭔지 손에 꼽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옥상에는 빨갛게 달아오른 고추가 일광욕 중이고, 무청 이파리는 바스러질 것처럼 줄에 걸려있고, 양파, 마늘 망태기도 곳곳에 있어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런 풍성함에 홀렸을까? 그날 이후 아빠의 ‘여주살이 꿈’은 추진력을 장착했다. 과감한 행보가 이어졌다. 이렇게나 ‘행동파’였던가? 우리 아빠가 맞나 싶을 정도로 거침없이 진격하셨다.


몇 년을 두고 차근차근 단계를 밟으며 준비해도 귀농이 쉽지 않다고 한다. 시골에 적응하지 못할까 봐 임시 거처를 마련해 일정 기간 시골살이 준비운동을 하는 이도 많다. 대부분 그렇게 하라고 권한다. 그런데 아빠는 달랐다. 시골에 정착하는 데 예상되는 어려움을 고려하지 않는 듯 보였다. 어려운 일 생겨도 그저 ‘부딪혀보면 되지’라는 단순한 생각이었던 거 같다. 간단한 생각에 가벼운 마음이었다.


순박한 아빠는 급하게 불을 끄듯 집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귀농 귀촌 센터를 찾기 전에 사륜구동 SUV 중고 매물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원두막 쉼터와 흔들그네 의자 설치 견적을 뽑아보셨다. 아빠는 퇴직금을 전부 쏟아부어 자영업을 시작한 직장동료분의 이야기를 꺼냈다. 가게를 하는데 장사가 안된다고 하면서 그런 것보다는 여주로 가는 게 훨씬 남는 장사 아니겠냐고 덧붙이셨다.


30년간 근로 소득자로 도시에서만 지내던 ‘찐 도시인’ 아빠에게 시골 생활은 어떤 의미였을까? 은퇴 후 편안한 ‘전원생활’을 그리지는 않았을까?


시골을 물로 본 건 아빠의 오산이었다. 아빠는 ‘도시와는 전혀 다른 세계’를 몰라봤다. 그 덕분에 아빠는 시행착오를 몸소 겪으며 시골살이를 시작하셨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시골 땅으로 내려온 두 분은 처음엔 앞 텃밭이 있어도 뭘 키워보려는 생각은 없었다. 키워 먹을 자신이나 기술도 없을뿐더러 실은 거저 먹겠거니 생각했었다. 원시인들의 채집활동처럼 자연이 심고, 자연이 준 열매를 따서 먹기만 하면 된다 생각했다. 처음 이 집에 왔을때 텃밭에, 옥상에 널린 채소며, 집 주변에 심어진 과실수가 많았으니 더 그랬을 거다. 때마다 거저 과일이 달리고, 줍줍 따먹는 에덴동산을 꿈꾸었던 건 아닐지. 그런 꿈인지, 환상일지 모를 상상으로 겨울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혹독하게 시리던 겨울이 지나고, 날이 풀리니 마음이 노근노근 누그러졌다. 파릇파릇 풀이 돋아나고 게 중엔 먹을 만한 식용 풀도 지천으로 깔리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봄나물과 산나물을 채집하는 시기가 왔다. 도시인 엄마도 쑥 정도는 분간했다. 쑥개떡이며, 쑥국 된장국을 끓여서 봄을 제대로 즐겼다. 쑥보다 한 단계 높은 게 냉이다. 쑥은 주로 연한 잎사귀를 뜯으면 되지만, 냉이는 뿌리째 뽑아야 제 맛이다. 하지만 굵은 뿌리를 온전히 보전하는 게 쉽지 않다. 그뿐 아니라 엄마는 처음에 냉이가 눈에 익지 않았다. 냉이 비스무리한 나부랭이를 잔뜩 뜯어오는 바람에 죄다 버렸다.


산나물, 봄나물을 캔다고 여기저기 살피는데, 화단에 뭐가 총총 올라왔다. 진정 맨땅이었는데, 흙바닥에서 연둣빛 막대가 쏙쏙 올라왔다. 생명체가 있었다니 눈으로 보는데도 안 믿겼다. 여기가 갯벌이라면 쭉 잡아당겼을 텐데 뭔지 모르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장미가 필 때쯤었다. 연두빛 이름모를 막대는 엎치락뒤치락 자라더니 그 끝에 장미처럼 붉은 꽃이 피어났다. 꽃송이가 정말 크다. 앞집 마당에도 같은 꽃이 피어나길래 이름을 물었더니 ‘작약’이란다. 이름은 별로다. 작약? 폭약? 뜬금없이 폭탄이 떠오른다. 꽃송이는 폭탄처럼 펑 터질 것 같은 기세로 점점 탐스러워졌다. 어른 주먹 두 개 합친 크기였다. 속이 꽉 여물었다. 겹겹으로 쌓인 양파가 활짝 벌어진 모양이다. 꽃 한 송이에 달린 꽃잎이 한두 장이 아니다. 수십 장의 꽃잎이 감싸고 있는 작약은 ‘겹작약’이란다. 단출한 잎사귀의 ‘홑작약’과 구분해서 그렇게 부른단다. 앞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겹작약은 여기 살던 아주머니가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작품이었다. 화단에서 있던 ‘홑작약’을 뽑아내고, 빈 자리에 ‘겹작약’만 옮겨 심어 ‘겹작약 화단'을 완성했다고 했다. 아주머니의 수고로 우리는 거저 호사를 누렸다.


나물, 작약뿐 아니라 자연에서 배울 게 가득하다. 우리 집 식구는 모두 도시 생활에 오래 길들여지고, 최적화되어서 자연과는 친하진 않다. 통성명하지 못한 개체가 수두룩했다. 집 주변에 과일나무가 그렇게나 많아도 처음엔 정체 모를 것들뿐이었다. 그게 그거였다. 어느 놈이 뭔 열매가 맺히는지 봄에는 몰랐다. 나뭇가지만 봐서는 알 길이 없었다. 신분증을 요구할 수도 없고, 이름표가 달린 것도 아니니까. 어렸을 때 시골에서 살았다고 떵떵거리던 아빠도 나중엔 꼬리를 슬그머니 내렸다. 열매가 달려봐야 이게 사과나무였구나. 대추나무였구나! 알게 되었다. 한 해 지나고 보니 별 나무가 다 있다. 복숭아, 피자두, 대추, 사과, 포도, 매실, 오디, 보리수, 배나무까지.

여기서는 뭐든지 찬찬히 지켜보고, 관찰하는 맛이 있다. '겹작약인지 홑작약인지' 살피는 일도 은근히 재미있다. 유사품과 진짜 냉이를 구분하려면 눈썰미가 있어야 한다. 눈썰미는 한 번에 얻어지는 게 아니다. 자연의 속도에 맞춰 잠시 머무르다 보면 보인다. 바삐 돌아가는 속전속결 도시와는 달리 재촉하지 않아서 좋다.

올해로 10년 차다. 부모님이 여주로 내려가신 게. 아빠는 수백 번의 시행착오 끝에 자리를 잡고 ‘꾼’이 되었다. ‘밭작물의 달인 딱지’를 붙여도 될 만큼 자연인이 되었다. 광개토대왕의 꿈을 이어받아 영토 확장에 힘쓰고 있다. 그 사이 농업 학교에 다니면서 기술을 연마하고, 관계자와 결연도 맺고, 주변 어르신이 전수한 비법 덕에 한층 성장한 면모를 보인다. 뭣도 몰랐던 순박한 도시인이 어느덧 순도 백의 토지인으로 바뀌었다. 한때 낯선 땅 이방인은 ‘겹작약인지 홑작약인지’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구구절절 설명하는 마을 어르신이 되었다. 그 어르신은 이제는 시골의 겨울이 낯설고 춥지 않으실 게다. 또다시 봄은 온다는 걸 아니까. 봄을 맞이하는 기대감으로 겨울을 보내시겠지.


2024년 7월 25일, 의미 있는 날이다. 대외적으로는 파리 올림픽 개막일이다. 개인적으로 이날은 내가 처음으로 도전한 백일장의 수상자 발표일이다. 물론 수상자 명단에 내 이름은 없다. 그래도 이번 백일장이 뜻깊은 이유는 글쓰기에 물꼬를 터주고, 쓸거리를 남겨줬기 때문이다. 그 글을 브런치에 살포시 올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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