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새 학기 첫날, 교사도 학생도 어색하다. 첫 만남의 서먹함을 없애기 위해 퀴즈, 게임 등 ‘아이스 브레이킹’ 활동을 한다. 서먹했던 교실 공기는 점점 훈훈해지며 자기소개를 마친다. 학급 규칙을 설명하는 순서,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갑자기 찬물을 끼얹듯 조용해진다. 아이스 브레이킹으로 얼음 같던 딱딱한 분위기를 깼건만, 학생들은 일순간 다시 ‘얼음’이 된다. 담임의 단 한 마디 때문에.
“우리 반은 높임말로 대화합니다.”
깜짝 놀라 눈이 왕방울만 해진다.
“친구들끼리도 높임말로 이야기합니다. 서로를 ‘○○ 씨 또는 ○○ 님’이라고 부릅니다.”
아이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눈만 멀뚱멀뚱 서로 얼굴만 쳐다본다.
높임말 사용 전과 후 달라진 어떤 학급의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보여준다. 그리고 높임말의 좋은 점을 설명한다. 이쯤 되면 용기 있는 학생 한 명이 조심스럽게 질문한다.
“다른 반도 높임말을 쓰나요?”
“아니요. 우리 반만 합니다.”
아이들은 이제 멘붕 상태가 된다. 그리고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머릿속 생각이 흔들리는 동공을 통해 보인다.
‘헉! 망했다. 올해 죽었다. 담임 잘 못 만났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도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높임말을 진짜 사용해야 할지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이 사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높임말이 차마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호기심 많은 한 명이 제일 친한 친구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이야기한다.
“○○ 씨, 안녕하세요? 우리 같은 반이네요.”
학급 전체의 시선이 그 친구에게 집중된다. 분명 작은 소리로 이야기했건만, 확성기에 대고 소리친 듯 모두의 귓속에 또렷하게 전해진 것은 높임말.
담임은 이 순간을 절대 놓치지 않는다. 호기심 씨를 격하게 칭찬한다. 세상에서 제일 장한 일을 한 사람인 것처럼.
“호기심 씨, 너무 잘했어요. 친구와 저렇게 높임말로 이야기하는 거예요. 호기심 씨가 우리 반 높임말의 선구자네요. 첫 시작을 정말 훌륭하게 해 주었어요. 호기심 씨, 기분이 어때요? (어리둥절한 호기심) 아~좋다고요. 모두 저렇게 할 수 있겠지요?”
졸지에 높임말의 선구자가 된 호기심 씨는 환하게 웃는다. 그리고 친구에게 높임말로 조잘거린다. 아까보다 목소리가 커졌다.
지켜보던 아이들은 더듬더듬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어~ ○~○~아~, 아니 ○~○~씨~, 안~녕~하~하~세~요.”
3월 첫날 높임말을 텄다. 올해 1년 우리 반 인성 농사는 문제없다.
나는 20년 차 초등 교사이다. 신규 발령 당시 일부 선배 교사들은 새내기에게 교실에서 담임의 태도에 관해 신나게 설교했다.
“아이들 앞에서는 웃으면 안 되는 것 알지? 아이들은 말로 하면 절대 듣지 않는다고.”
선배 교사들의 말대로 웃지 않았다. 규칙을 어긴 학생에게 벌점을 적용했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우리 반 아이들은 열심히 떠들었다. 자주 갈등이 발생했다. 서로 상대 탓을 하며 담임에게 이르기 일쑤였다. 왜 선배 교사의 말이 맞지 않는 것일까?
예쁜 아이들에게 웃어주지 않는 것이 더 힘들었다. 다음 해엔 각종 상점 제도를 적용하며, 칭찬 스티커를 남발했다. 스티커 개수에 따라 사비를 들여 선물도 듬뿍 주었다. 칭찬 스티커 붙이는 재미를 느낀 아이들은 열심히 생활했다. 벌점 제도보다는 학급 운영이 훨씬 수월했다. 그러나 뭔가 아쉬움이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칭찬 스티커 따위에 관심이 없는 아이들도 있었다. 스스로 스티커 판을 채우게 했더니, 거짓으로 스티커를 붙이며 악용하는 사례도 발생했다.
육아 휴직을 마치고 복직 연수를 들었다. 학생인권조례가 발표되었단다. 체벌은 절대 금지가 되었다. 상점 제도 역시 비교육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학급을 운영해야 할까? 강의하시는 한 선생님께서 교사의 언어사용에 대해 지나가듯 말씀하셨다. 교사가 학생에게 높임말을 쓰라는 것이었다. 연수 기간 중 다양한 강의를 들었다. 그러나 나의 뇌리에 남은 것은 오직 단 하나, ‘높임말’ 뿐이었다.
‘그래, 결심했어. 높임말을 써보자.’
복직을 했다. 다짐한 대로 학생들에게 높임말을 썼다. 휴직 전에도 수업할 때는 높임말을 했었다. 이제는 일상 대화에서도 사용했다. 말하는 교사도 부자연스럽고, 듣는 학생도 어색해했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계속했다.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어느 순간 아이들도 서로를 ‘○○씨’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한 번도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한 적이 없었는데도 말이다.
다음 해에도 나는 학생들에게 높임말로 이야기했다. 몇 달이 지나니 또 아이들은 존칭을 사용해서 서로를 불렀다. 혹시 아이들끼리도 높임말로 대화할 순 없을까? 2학기가 되어 학급 전체가 높임말로 대화하자고 했다. 처음에 아이들은 당황했지만, 반발하진 않았다. 이미 담임의 높임말에 익숙해졌고, 들었을 때 존중받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던 대로 편하게 말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야단치지 않았다. 그냥 높임말 사용을 반복해서 지도했다. 점점 높임말을 잘 쓰는 아이들이 늘어났고, 분위기가 형성되니 모두가 사용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이들은 달라졌다. 높임말은 거친 말을 통제하는 듯했다. 하고 싶은 대로 아무 말이나 뱉지 않았다. 한 번 생각한 뒤 긍정적인 예쁜 말을 했다. ‘고맙습니다.’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다.’가 세트처럼 나왔다. 비속어를 일상으로 쓰던 아이도 학급에서는 감히 나쁜 말을 할 수 없었다. 부정적인 말이 이상한 분위기가 된 것이었다.
말이 달라지자 학급에서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다. 다툼이 생길 상황도 잘 넘어갔다. A가 지나다가 B의 물건을 떨어뜨렸다. B가 발끈하며 말했다.
“왜 남의 물건을 떨어뜨리고 가십니까?”
A가 태연하게 말했다.
“에이, 뭐 그런 걸 가지고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미안합니다. 실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 반의 가장 큰 말다툼이었다.
말은 행동을 변화시켰다. “제가 도와드릴까요?”, “제가 빌려드릴까요?” 아이들은 서로 도와주고 물건을 나누어 썼다. 학급을 위한 봉사를 스스로 찾아서 실천했다. 행동이 달라지자 생각이 바뀌었다. 학교에서 하는 모든 활동이 즐겁다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수업 너무 재미있다며 열심히 공부했다. 학업도 크게 향상되었다.
높임말로 대화하는 학급을 운영한 지 10년이 넘었다. 첫 성공 이후 높임말 프로젝트를 학급 특색으로 정하고, 지속적으로 지도하고 있다. 해마다 엄청난 언어의 위력을 느낀다. 언어가 달라지니, 아이들의 행동과 생각이 뒤따라 변화되었다. 높임말을 쓰면서부터 인성 교육을 따로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예쁜 말을 하며 긍정적인 덕목을 자동으로 실천했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아도 귀한 가치를 스스로 체화했다. 이해, 공감, 배려, 행복, 사랑, 응원, 격려, 협력, 칭찬, 사과는 우리 학급에 항상 존재했다. 높임말이 일상이며, 일상이 곧 인성 교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