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잼 도시 자이(嘉義)에서 유잼 찾기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4#24

by 끼미


타이난과의 작별 여행을 마치고 기차 타고 북쪽으로 이동했다. 목적지는 ‘아리산(阿里山) 말곤 아무것도 없는 노잼 도시’, 자이(嘉義)였다. 가뜩이나 재미없기로 소문난 데다 두 번째 방문이기까지 한 이 도시에서 무려 4일씩이나 머무르기로 한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일단 재방문의 가장 큰 목표였던 아리산에 다녀오려면 이틀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머지 이틀은, 시간 끌기용이었다. 타이베이 돌아가면 당장 한국행 비행기 타야만 할 것 같아서, 그래서 자이에서 최대한 오래 머무르고 싶었다. 이대로 한국 가긴 싫으니까.


그렇게 시작됐다. 대만 워홀의 마지막 여행지, 노잼 도시 자이에서 유잼 찾기.




걱정과 달리 첫날부터 재미를 찾아냈다. 그 재미란 역시 먹는 거였다. 숙소에 짐 풀자마자 자이의 대표 음식인 찌로우판(鷄肉飯, 닭고기 덮밥)을 먹으러 달려갔다. 식당에서 먹을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테이크아웃을 했다. 날도 좋으니 야외에서 먹고 싶었다.


파란 하늘이 슬슬 주황색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시간. 공원 벤치에 앉아 강아지와 함께 산책 나온 사람들을 보며 종이 도시락에 담긴 찌로우판을 먹었다. 흰쌀밥 위에 닭가슴살과 간장 소스 올린 찌로우판. 지난번에 갔던 식당보단 별로였다. 맛집이래서 기껏 멀리까지 왔더니 실망스러웠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바로 눈앞에 대만에서 본 것 중 가장 고혹적인 노을이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주황색과 분홍색, 보라색이 동시에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는 하늘. 그를 올려다보며 먹으니 퍽퍽한 닭고기에서 엄마가 삶아줬던 촉촉한 백숙 맛이 나는 듯했다. 역시 야외에서 먹는 밥은 언제나 유잼이었다.


황홀한 노을 보며 먹은, 자이의 명물 찌로우판(鷄肉飯)


둘째 날 점심도 찌로우판을 먹고 자이대학교를 구경하러 갔다. 예쁜 호수가 있는 그 학교에는 먹보를 웃게 할 재미가 숨어있었으니, 바로 아이스크림이었다. 자이대학교는 우리나라의 건국대학교처럼 축산업과 유가공품으로 유명한데, 교내 매점에 가면 이 학교에서 만든 우유 아이스크림을 맛볼 수 있다고 했다.


예의상 교정을 한 바퀴 돌아본 뒤, 드디어 그 아이스크림을 영접했다. 사실 특출한 맛은 아니었다. 하지만 원산지에서 먹는 기분은 남달랐다. 지금도 교정 어딘가에선 이 아이스크림을 만들고 있지 않을까, 상상하니 아이스크림이 왠지 더 신선하게 느껴졌다. 기대했던 호숫길 산책과 젖소 구경은 못 했어도 아이스크림 하나로 충분히 즐거웠던 자이대 탐방이었다.


아름다운 호수와 축사, 신선한 우유 아이스크림이 있었던 자이대학교


이날 저녁엔 듣기만 해도 아주 재밌는, 자이의 또 다른 명물을 먹으러 갔다. 차가운 면에 마요네즈 소스를 넣어 비벼 먹는, 자이식 량미엔(涼麵)이었다. 량미엔은 보통 참깨 소스인 즈마장(芝麻醬)과 간장 등으로 만든 소스가 들어가는데, 그냥 먹어도 맛있는 량미엔에 자이 사람들은 느끼한 마요네즈를 넣어 먹는다고 했다. ‘도대체 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맛있다고 하니 량미엔 애호가로서 안 먹어볼 수가 없었다.


자이식 량미엔은 예상했던 대로 황당했다. 넓적한 면 위에 올려진 하얀 마요네즈 소스. 처음 보는 비주얼이었다. 맛은 더 황당했다. 세상에, 완전 내 취향 저격이었다. 마요네즈의 부드럽고 달큰한 맛이 고소한 참깨 소스와 상당히 잘 어울렸다. 느끼할 때쯤 칼칼한 고추기름을 곁들이니 또 다른 맛이 났다. 역시 음식은 직접 먹어봐야 아는 거였다. 단돈 35위안(한화 약 1,500원)으로 맛본 량미엔의 신세계. 자이에서 찾아낸, 작지만 큰 즐거움이었다.


마요네즈 소스 끼얹은 자이식 량미엔(涼麵)


노잼 도시 자이에서 재미 찾기는 셋째 날에도 계속됐다. 이날은 남들은 노잼이라지만 나에겐 분명 유잼일 장소를 찾아갔는데, 바로 자이 북회귀선 기념비(嘉義 北回歸線 標誌)였다.


4월 중순이지만 한여름처럼 햇빛이 따가운 오전 10시. 북회귀선이 지나가는 지점에 도착했다. 길을 따라 이곳이 북회귀선임을 알리는 표지석들이 늘어서 있었다. 세계지리 수업 때 아이들에게 가르쳤던 그 북회귀선이 내 머리 위를 지나간다니,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표지석 뒤에서 웅장한 자태를 뽐내는 기념관을 둘러봤다. 딱 봐도 연식이 느껴지는 옛날 스타일의 과학 전시관과 별다른 전망 없는 전망대. 그게 전부였다. 아무리 평일이라지만 손님보다 자원봉사자분들이 훨씬 더 많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람들 말대로, 굳이 찾아올 만한 곳은 전혀 아니었다.


하지만 나에겐 북회귀선에서의 한 시간이 정수리 바로 위를 지나는 태양처럼 뜨거웠다. 지구가 어쩌고 달이 어쩌고 하는 우주 이야기로 가득한 전시관 안에서 우주인을 꿈꿨던 열한 살 소녀로 돌아간 듯 행복했고, 다시 지리를 가르친다면 꼭 이곳 얘기를 해야겠다고 상상하며 설레기도 했다.


솔직히 이런 게 왜 재밌는진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이제 지리 선생님 말고 제빵사가 되겠다고 다짐까지 해놓고선. 그래도 여전히, 그냥 좋았다. 이 땅과 이 지구, 이 우주를 상상하며 보낸 한 시간은 단순한 시간 때우기가 아니었다.


북회귀선 표지석들과 우주 전시실


저녁에는 마요네즈 량미엔만큼이나 재밌는 자이 음식에 도전했다. 현지인들이 줄 서서 먹는다는, 생선탕이었다. 처음엔 먹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국에서도 동태탕이니 하는 생선 들어간 국 요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들 자이 가면 꼭 먹어야 한다고 하니 도대체 얼마나 맛있나 싶어 먹어보기로 했다.


소문대로 손님들로 바글바글한 식당 안. 비릿한 생선 냄새가 풍기는 그곳에서 생선탕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정신 차려보니 접시 위에 앙상한 생선 뼈만 남아 있었다. 녹진하면서도 깔끔한 국물, 튀긴 다음 다시 끓여 더욱 촉촉하고 부드러운 생선살, 푹 익어 흐물흐물해진 배춧잎과 두부피(豆皮), 거기에다 한입 먹을 때마다 퍼지는 은은한 후추 향까지. 내 인생 최고의 생선 요리였다.


젓가락으로 열심히 생선 살을 발라 먹으며 생각했다. 앞으로도 새로운 음식들에 도전해 보자고. 생김새가 별로라서, 원래 안 좋아하는 생선 요리라는 이유로 거부하기엔 재밌는 음식들이 많다는 걸 자이에서 배웠으니까. 그렇게 선입견 없이, 열린 마음으로 살다 보면 좁았던 내 세계도 조금씩 넓어질지도 모르고 말이다.


자이에서 먹은 인생 최고의 생선 요리 그리고 폭풍 흡입의 흔적


대체 뭘 하면서 시간 때워야 하나 싶었던 자이 여행. 소문대로 큰 유잼은 없었지만, 자이만의 소박한 매력을 즐기다 보니 어느새 4일 중 3일이 흘러가 있었다.


이 노잼 도시에서 남은 할 일은 이제 딱 하나, 아리산 가기. 등산 싫어하는 내가 혼자 잘 갈 수 있을까 걱정하던 셋째 날 저녁, 노잼 산행을 꿀잼으로 바꿔줄 구세주가 나를 찾아왔다.


나랑 아리산 가려고 가오슝에서 급히 저녁 기차 타고 날아온, 전(前) 옆방 언니, 쮠쮠 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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