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4#26
또 햄버거였다. 두툼한 소고기 패티 위로 고소한 땅콩버터 소스가 먹음직스럽게 흘러내리는, 대만에서 처음 먹어보고 반해버린 바로 그 햄버거. 그리고 맞은편에는 오늘 처음 마스크 벗은 얼굴을 본, 낯선 대만 사람이 앉아 있었다.
잊고 있던 반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어학당에서 만난 일본인 통쉐(同學, 같은 반 친구)가 친구 없어서 외롭다고 하소연하던 나에게 자기 대만 친구를 소개해줬던 날. 땅콩버터 햄버거 먹으며 어색한 대화를 나눴던 우리의 만남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오늘 이 자리는 어떻게 될까? 우린 친구가 될까, 아니면 그때처럼 햄버거만 먹고 끝날까?
아리산에서 하산한 쮠쮠 언니와 나는 곧장 햄버거 가게로 향했다. 자이에서 시작해 대만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는 가게였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우리와 함께 햄버거를 먹기로 한 사람 덕분이었다.
“진짜 너무 신기해요. 어떻게 거기서 딱 만나지?”
“그러니까요. 저도 손님이랑 같이 밥 먹는 거 처음이에요.”
휴지로 입가에 묻은 땅콩버터 소스를 닦으며 한국어로 대화 중인 두 사람을 쳐다봤다. 내 옆자리엔 쮠쮠 언니가 엄청난 우연에 감탄하고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유창한 한국어로 맞장구치는 대만 사람이 앉아 있었다. 땡그란 안경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그녀는 내가 자이에서 4일째 묵고 있는 호텔의 직원이었다.
우리의 햄버거 회동은 쮠쮠 언니의 한 마디에서 시작됐다. 아리산 가기 전날 밤, 나와 같은 숙소에서 묵기로 한 언니랑 같이 체크인을 하러 갔다. 그런데 마침 리셉션에 자기 한국어 할 줄 안다며 나와 몇 마디 나눴던 직원이 있었고, 이를 안 언니가 이것도 우연이니 밥 한 번 같이 먹자고 해서 만나게 된 것이다.
이 신기한 만남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어색할까 걱정했지만 붙임성 좋은 두 사람 덕분에 두 시간이나 떠들었다. 중국어 안 해도 되니 긴장도 덜 됐고, 셋의 상황이 비슷하다는 것도 대화가 편했던 이유였다. 30대 초중반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 그러나 아직 세상을 표류 중인, 그럼에도 자신만의 행복한 인생을 꿈꾸는 우리. 왠지 모를 동지애가 느껴졌다.
내일 일찍 출근해야 한다는 직원 친구와 헤어지고 언니를 배웅하기 위해 자이역으로 걸어갔다.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천천히 걷다가 조금 전 햄버거 먹으며 했던 생각을 언니에게 털어놨다.
“오늘 언니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그래서 사람들이랑 몇 번 연락하고 나면 끝인가 봐요.”
까만 하늘 위로 지금껏 연락을 주고받았던 사람들의 얼굴이 휘리릭 지나갔다. 어학당 언어교환 프로그램으로 만났던 말레이시아 유학생, 처음 살았던 동네에서 까만 개냥이 시아오헤이(小黑) 쓰다듬다가 만나 내가 먼저 요청해서 같이 밥 먹고 대학교 캠퍼스 산책도 했던 여학생, 지갑 찾으러 간 기차역에서 처음 만났다가 며칠 후 기차 안에서 우연히 다시 마주쳤던 역무원 그리고 언어교환 어플 통해서 만났던 모든 대만 사람들까지. 여전히 메신저 친구 목록에 있지만 더는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채팅창이 조용해진 건 언제나 나 때문이었다. 공부하랴 알바하랴 여행 다니랴 정신없는 와중에 잘 못 하는 중국어로 메시지 주고받는 게 귀찮았던 나, 상대방에게 딱히 할 말도 궁금한 것도 없었던 나, 그래서 답장을 점점 늦게 보냈던 나. 우리의 대화가 오래가지 못한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도 그래요. 롱롱은 나 친구 많은 줄 알죠? 아니에요. 나도 몇 번 연락하다 끝나요. 귀찮아, 연락하는 거.”
“에이, 거짓말.”
“진짜예요. 대화가 잘 통하면 계속 연락하는 거고, 아니면 마는 거고. 모두랑 친구가 될 수는 없잖아요.”
해탈한 듯 웃는 언니의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대왕 느낌표가 나타났다. 그러고 보니 난 왜 모두와 친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여태껏 한 번 관계를 맺었으면 쭉 이어가는 게 당연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 당연한 걸 못하는 나를 비난했었던 거다. 모두 내가 이기적이고 게을러서 그런 거라면서. 그런데 언니 말을 듣고 나니 조금은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들과 인연이 되지 못한 건 단지 내 성격 때문만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잘 맞지 않아서였던 걸지도 몰라. 애초부터 스쳐 가는 모든 옷깃을 붙잡을 필요도 없고, 그럴 수도 없는 거였어. 그러니 나를 탓하는 대신 그들과 옷깃이라도 스칠 수 있었음에 감사하면 되지 않을까.‘
일 년 동안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던 무거운 바위들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가오슝으로 돌아가는 언니를 배웅하고 숙소 가는 길, 햄버거 회동 단톡방에 언니의 메시지가 떴다. 오늘 만나서 즐거웠다고. 잠깐 고민하다가 헤어지기 전 셋이 찍은 셀카와 함께 한 마디를 보냈다.
“기회 되면 다음에 또 만나요!”
이 단톡방은 며칠이나 갈까? 우린 정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우리의 미래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앞으로 햄버거 먹을 때마다 오늘이 생각날 거라는 건 분명했다. 자이에서 옷깃 스친 이 따뜻한 밤이.
그렇게 대만 워홀의 마지막 여행지, 자이에서의 마지막 밤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