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4#28
큰일이었다. 대만 떠나기 바로 전날에 할 일이 사라졌다. 항공사 사정으로 출국일이 하루 당겨지는 바람에 그날 보기로 했던 대만 친구 도리씨를 미리 만나버렸기 때문이다.
외로움과의 사투였던 지난 일 년. 마지막 날만큼은 혼자 거리를 배회하기 싫어서 미리 계획을 세웠다. 오후에 드라마 <상견니>에 나온 카페 가서 추억 여행하고, 저녁엔 알바했던 한식당 가서 사장님들께 인사드리고 밥도 먹는, 아주 완벽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나의 대만 워홀은 마지막까지도 결코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출국 하루 전날 오후, 계획대로 <상견니>의 그 카페에 갔다. 마침 여자 주인공이 앉았던 창가 자리가 비어있었다. 곧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나왔다. 이제 성지 순례의 기쁨을 만끽할 시간. 그런데 예상치 못한 방해꾼이 등장했다.
“롱롱, 내가 사진 찍어줄게요!”
그 사람은 바로, 쮠쮠 언니였다. 가오슝 쉐어하우스에서 만난 전(前) 옆방 언니.
전날 밤, 언니에게서 메시지가 왔었다. ‘롱롱 떠나기 전에 밥 사주고 싶어요.’라고. 당연히 그냥 하는 얘기인 줄 알고 ‘타이베이 구경할 겸 저 보러 오세요!’라고 답장을 보냈다. 나도 언니가 보고 싶긴 하지만 설마 오시겠어?
그런데 이 언니, 진짜로 왔다. 가오슝에서 버스 타고 장장 다섯 시간을 달려서. 언니랑 웃으며 얘기하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진짜 여기까지 왔다고?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잘해주는 거지? 언니의 깜짝 방문이 고맙기도, 아리송하기도 했다.
언니의 등장으로 <상견니>의 감동을 진하게 즐기려던 계획은 무산됐다. 드라마 한 번도 안 본 머글인 언니 앞에서 혼자 호들갑을 떨 순 없었다. 하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비어있던 옆자리를 채워주고, 덕후인 날 위해 열심히 인증 사진 찍어준 언니 덕분에.
나 밥 사주러 온 언니와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갔다. 마지막 만찬 장소는 역시나 그곳이었다. 6개월 동안 열심히 뚝배기 나르며 방값 벌었던, 쿨하지만 따뜻한 두 사장님이 계신 그 한식당.
빨간 미닫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여자 사장님께서 “롱롱씨, 왔어?” 하며 반갑게 맞아주셨다. 나도 같이 올 줄 몰랐던 일행을 소개한 뒤 곧바로 미리 정해뒀던 메뉴를 주문했다. 원래 먹을 생각이었던 최애 메뉴 육개장 그리고 예정엔 없었지만 언니 덕분에 먹게 된 차애 메뉴인 돌솥비빔밥을.
“롱롱이 극찬할 만하네요. 맛있어요.”
“그쵸? 한국 가면 우육면보다 이 육개장이 더 그리울 것 같아요.”
역시 최고의 선택이었다. 인심 좋은 옆방 언니가 사주는 밥인 데다 사장님이 서비스로 해물전까지 주신 덕분에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풍족하고 맛있는 저녁 식사를 즐겼다.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싹싹 비우고는 사장님들과 즐거운 수다 타임을 가졌다. 이상한 손님 왔었던 얘기, 가오슝에서 자전거 타다 넘어졌던 얘기, 벌써 여름처럼 더운 대만 날씨 얘기 등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눴다. 평소처럼, 예상했던 대로. 떠들다 보니 어느덧 가게 문 닫을 시간이었다. 사장님들께 작은 선물과 편지를 건넨 후 함께 셀카를 찍었다. 반년 동안 거의 매일 봤으면서도 같이 사진 찍는 건 처음이었다.
마지막으로 감사 인사를 드렸다. 두 분 덕분에 외로운 대만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고, 좀 오글거리지만 준비했던 말을 전했다. 당연히 울 줄 알았지만 다행히 코만 살짝 훌쩍거리다 말았다. 그렇게 내일 또 볼 것처럼 쿨하게 인사하시는 두 분을 뒤로한 채 빨간 문을 오른쪽으로 밀었다. 아주 천천히.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는 마지막 날. 예정에 없던 깜짝 만남이 또 한 번 이루어졌다. 나와 쮠쮠 언니, 그리고 정말로 예상치 못한 사람과 함께였는데, 바로 내 알바 후임으로 온 동생이었다. 후임 동생은 인수인계하느라 며칠 같이 일하면서 안면을 텄었다. 그때도 동생이 먼저 살갑게 다가와 줬었는데, 내가 내일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우니 셋이 더 놀자고 제안했다. 자기가 술 사겠다면서.
“와~ 반갑습니다~”
“간빠이(乾杯, 건배)~”
컴컴한 공원에 앉아 인사를 나눈 셋은 동생이 사준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한참 떠들었다. 30분 정도 얘기할 줄 알았는데 웬걸, 정신 차리고 보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솔직히 좀 피곤하긴 했지만 오늘 초면인데도 죽이 잘 맞는 쮠쮠 언니와 후임 동생을 지켜보는 게 즐거워서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자정이 넘어서야 겨우 일어선 우리는 타이베이 버스 터미널까지 같이 갔다. 가오슝으로 돌아가는 쮠쮠 언니를 배웅하기 위해서였다. 잠깐 사이에 부쩍 친해진 우리 셋은 다정하게 꼭 붙어서 셀카를 찍었다. 오래도록 기억될, 대만 워홀의 마지막 단체 사진이었다.
버스 출발 5분 전. 가오슝에서 이 먼 곳까지 달려와준 쮠쮠 언니와 피곤할 텐데도 늦은 밤까지 함께 해준 후임 동생을 꼭 끌어안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건강하게 지내다 다음에 또 만나요.”
다시 혼자가 되어 돌아온 숙소 앞.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만 떠날 준비하는 동안 어딘지 쓸쓸하고 외로웠던 마음을 달래준, 애교 많은 까만 길냥이었다. 마지막 날에도 볼 수 있을 줄은 몰랐는데. 예상치 못한 만남이라 더 반가웠다.
오토바이 옆에 쭈그리고 앉아 냐옹이의 맨질맨질한 등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피곤해서 눈이 절로 감겼다. 이렇게 늦게까지 놀 계획은 전혀 없었는데 벌써 1시라니. 내일 제시간에 일어날 수 있을지 걱정됐다.
그러면서도 오늘 있었던 일들이 떠올라 웃음이 나왔다. 혼자 있기 싫어서 계획 세웠던 게 무색할 정도로 많은 이들과 함께 한 마지막 날이었다. 나 밥 사주려고 가오슝에서 날아온 쮠쮠 언니, 언제나처럼 따뜻하게 반겨주셨던 두 사장님들, 일하느라 피곤했을 텐데 술까지 사준 후임 동생, 그리고 지금 옆에서 골골송 부르고 있는 냐옹이까지.
새삼 인생은 참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만 친구도 못 사귀고, 가깝게 지냈던 한국 친구와는 멀어지고, 밤마다 혼자 외롭게 맥주를 마셨던 지난날들. 그랬던 내가 대만 워홀을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마무리하게 될 거라고, 그 누가 알았을까?
“나랑 같이 있어줘서 고마웠어, 냐옹아.”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따뜻했던, 대만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