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351, 대만에서 한국으로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4#29

by 끼미


“샤오삥딴(燒餅蛋, 계란부침개 넣은 페스츄리) 하나랑 또우장(豆漿, 콩물) 시원한 걸로 하나 주세요.”


2022년 4월 23일 오전 9시 10분. 타이베이역 근처 자오찬(早餐, 아침 식사) 가게에서 늘 먹던 메뉴를 주문했다. 평소와 같은 아침이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내 옆에 커다란 캐리어 두 개가 있다는 것이었다.


약 15분 뒤, 타이베이역에서 출발해 타오위안 공항으로 가는 열차 앞에 서 있었다. 활짝 열린 문 사이로 텅 빈 객실이 보였다. 출발 4분 전.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캐리어를 번쩍 들고 열차 안으로 들어섰다.


예정대로 9시 30분에 출발한 기차는 어두운 터널 안을 달리다 이내 지상으로 나왔다. 창밖으로 회색 하늘과 때 묻은 건물들이 보였다. 이젠 한국보다 익숙한 대만의 풍경이었다. 곧 낯익은 다리가 등장했다. 시내버스 타고 몇 번 오갔던, 타이베이와 신베이를 연결해 주는 다리였다.


다리를 보니 누군가가 생각났다. 이 근처에 사는, 며칠 전 마지막으로 만났던 대만 친구 도리씨. 그날 저녁, 퇴근하고 온 도리씨에게 한국식 치킨도 쏘고 선물도 건넸다. 받기만 해서 늘 미안했는데 이렇게라도 은혜를 갚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래도 더 맛있는 거 사줄 걸 그랬다고 생각하며 도리씨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한국 오면 꼭 연락하라고,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좌) 공항 가기 전 마지막으로 들린 자오찬 가게 / (우) 기차 안에서 본 타이베이의 마지막 모습


신베이시를 달리던 기차는 캄캄한 터널 안으로 들어갔다. 새까매진 반대편 창문에 내가 나타났다. 하얀 원피스 입고 하얀 마스크 낀 채 혼자 앉아 있는 나. 그 모습을 고요히 바라보던 그때, 마음속에서 절규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국 가기 싫어!!!’


동시에 마스크 위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이제 겨우 대만 생활을 즐기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떠나야 한다니. 서럽고 억울했다. 더 즐겁게 놀 걸, 더 웃으면서 지낼걸. 혼자 우울하게 보냈던 지난날을 떠올리자 명치 부근이 아려왔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아무도 없는 고요한 기차 안에서 울고 또 울었다. 긴 터널에서 빠져나와 다시 햇빛이 비칠 때까지, 마스크가 축축해지도록.


타오위안 공항 가는 열차


두 눈이 퉁퉁 부은 채 타오위안 공항에 도착했다. 타이베이역에서 겨우 4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허무한 마음으로 출국 수속을 밟았다. 탑승권 발급부터 출국 심사까지, 모든 게 순식간이었다. 대만에서의 지난 일 년처럼.


탑승장 가기 전에 또우화(豆花, 연두부에 토핑 올린 디저트)를 먹으러 갔다. 대만 떠나기 전에 꼭 한 번 다시 먹고 싶었다. 지난 일 년 동안 외로운 마음을 달래줬던 그 또우화를. 역시나 탁월한 선택이었다. 달달한 또우화를 먹고 나니 기차 안에서 우느라 소진됐던 에너지도 충전됐고, 비행 앞두고 왠지 긴장됐던 마음도 풀렸다.


훨씬 맑아진 기분으로 탑승장에 갔다. 활주로에 서 있는 하얀 비행기 한 대가 보였다. 날 한국까지 데려다줄 비행기였다. 의자에 짐을 내려두고 비행기랑 같이 셀카를 찍었다. 휴대폰 화면 속에 일 년 전 인천공항에서보다 더 까맣고 더 통통해진 내가 있었다.


비행기 타기 전 마지막으로 대만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그동안 감사했다고 작별 인사를 보냈다. 아카에게는 특별히 전화도 했다. 쿨하게 잘 가라고 말하는 츤데레 아카에게 한국 이모 3호 까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뒤, 짐을 챙겨 들고 탑승 게이트로 향했다.


(좌) 대만에서의 마지막 또우화 / (우) 대만에서의 마지막 셀카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익숙한 한국어 인사로 반갑게 맞아주는 한국인 승무원분들을 보니 비로소 실감 나기 시작했다. 나 진짜 한국 가는구나. 활주로를 빠르게 달리던 비행기는 이내 부드럽게 공중으로 떠올랐다. 출발 예정 시각보다 30분 늦어졌지만 오히려 좋았다. 대만 땅에 조금이라도 더 머무를 수 있었으니까.


이륙한 지 30분 뒤, 기내식이 나왔다. 메뉴는 새우 볶음밥이었는데, 생각보다 맛있었다. 창밖의 새파란 하늘을 보며 먹고 있으니 웃음이 나왔다. 아깐 그렇게 울어놓고선 기내식 먹으며 행복해하다니. 다 꿈이었나, 생각하며 테이블 위를 정리했다.


(좌) 비행기 안에서 본 대만의 마지막 모습 / (우) 생각보다 맛있었던 기내식


저녁 7시. 다시 기차 안이었다. 서울역에서 출발해 동대구역으로 가는 KTX였다. 어떻게 기차에 탔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인천공항 도착 후 코로나 검사 결과지 제출하고, 자가격리 안내받고... 정신 차려보니 한강 지나는 중이었다.


집과 가까워질수록 점점 심란해졌다. 엄마 아빠가 대만에서 뭐 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지, 놀고먹기만 했는데. 이제 뭐 할 거냐고 물어보면 또 뭐라 하지, 지리 교사 말고 갑자기 제빵사 하겠다고 하면 정신 나갔다고 하려나.


두 시간 후, 동대구역에 내렸다. 대만 갈 때보다 무거워진 짐들과 함께 도착한 역 앞 광장. 저 멀리 빠마 머리를 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엄마!!!”


일 년 만에 만난 엄마는 나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잘 갔다 왔나, 딸래미.”


뭐라고 해야 할까. 잘 다녀왔다기엔 대만에서 너무 힘들었는데. 그렇다고 사실대로 말하자니 내가 놀고먹는 동안 힘들게 고생했을 엄마에게 염치가 없고. 끝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차를 타러 갔다.


그렇게 돌아왔다. 서른한 살 대만 워홀러에서 서른두 살 한국인으로.


(좌) 갈 때보다 늘어난 짐 / (우) KTX 안에서 본 한강의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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