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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끼미 Aug 01. 2024

대만 가던 날의 풍경

대만 워홀 생활기 시즌1#03

단촐한 짐

캐리어 두 개와 작은 보스턴백, 백팩 그리고 요가 매트. 나의 1년치 짐이었다.   

                            


배웅

2021년 5월 6일, 드디어 D-0. 

걱정 90, 설렘 10의 마음을 안고 집을 나섰다. 딸이 대만에 살러 간다는 소식을 불과 3일 전에 들은 아빠 그리고 그 소식을 당사자 대신 꺼낸 엄마가 동대구역까지 데려다줬다. 차를 타고 한 시간 여를 달리는 동안 셋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시 나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아빠는 주차를 이유로 차에서 내리지 않았고, 엄마만 내 짐을 들고 역 플랫폼까지 동행했다. 

잘 갔다온나.” 엄마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텅 빈 출국장                    

코로나가 한창이던 그날의 인천 공항은 소름 끼치도록 고요했다. 출국장을 채우던 북적거리는 인파와 여행의 설렘은 어디 가고 무거운 침묵만이 맴돌았다. 안개 낀 활주로에는 갈 곳을 잃어버린 비행기들로 가득했고, 늘 자리 싸움이 치열했던 탑승 게이트 앞은 영업시간이 끝난 카페처럼 텅 비어있었다. 탑승 시간을 기다리며 활주로를 배경 삼아 셀카를 찍었다. 사진 속의 나는 웃고 있지만 어딘지 공허해 보였다.  



긴장 속의 입국장

나를 포함하여 열 명도 채 안 되는 승객들을 태운 비행기는 우리를 무사히 대만으로 데려다 주었다. 타오위안 공항 직원들은 모두 하얀 방역복을 착용하고 양손에 하얀 니트릴 장갑을 끼고 있었다. 코가 간지러워 마스크를 조금만 내리면 바로 한국으로 돌려보낼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 비자로 입국 안 된다고 하면 어쩌지?’ 덜덜 떨리는 두 손을 진정시키며 직원에게 여권을 내밀었다. 워홀 비자가 붙어있는 페이지를 살펴본 직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여권을 돌려줬다. 통과였다. 참았던 숨을 작게 내쉬고 “앞으로 가세요(往前走).”라는 직원의 말에 따라 걸어갔다. 코로나 검사 결과지를 제출하고 한 달짜리 유심을 사서 갈아 끼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가격리 안내를 받았다. 

'입국 후에 14일 동안 외출 금지입니다.'



수상한 심야 택시

벌써 밤 11시, 택시를 타고 대만의 남쪽 도시인 가오슝으로 가는 중이었다. 자가격리를 하기 위해서다. 가까운 타오위안이나 타이베이에도 자가격리를 할 수 있는 방역 호텔들이 많이 있었지만, 굳이 가오슝까지 간 이유는 간단했다. 방값이 저렴했다. 그것도 30만 원이나. 아무리 죽기 전에 천 만원을 다 쓰기로 했다지만, 당장 대만에서 1년을 살아야 하니 일단 아껴야 했다.

30만 원을 아끼는 대신 불안함이 추가되었다. 중국어 바보인 여자 혼자 이 야심한 밤에 4시간 동안 택시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만 사람들이 친절하다 해도 걱정되는 게 당연했다. 택시에 타고 나서도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못했다. 구글 맵을 켜서 이 택시가 가오슝으로 똑바로 가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확인했다. '110, 110, 110....' 머릿속으로 대만 경찰 전화번호를 되내이며 10초마다 내위치를 새로고침했다.

불안한 와중에 밀려오는 졸음과도 싸워야 했다. 집 나온 지 15시간째였다. 꾸벅꾸벅 헤드뱅잉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기사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내가 중국어를 못한다는 걸 알아차린 기사님이 다시 얘기하셨다. 드디어 아는 말이 나왔다. 

   

"加油(찌아요)"


찌아요? 힘내라고? 내가 그렇게 힘들어 보이나?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다시 들어도 못 알아들을 테니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몇 분 뒤 택시가 멈춰 섰다. 어둠 속 저 멀리 보이는 파란 건물에 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加油(찌아요)'


주유소였다. 기사님의 加油는 말 그대로 '기름(油)을 넣는다(加)'는 뜻이었다. 그래도 한국에서 중국어 왕초보는 떼고 왔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이것도 못 알아듣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기사님이 화장실 갈거냐고 물으셨지만 여전히 불안한 마음에 괜찮다고 했다. 금방 돌아온 기사님은 시원한 생수병 하나를 건네주셨다. '그래, 여기 대만이지.' 택시 탄 지 3시간만에 폰을 내려놓고 잠깐 눈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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