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먹고 남은 복숭아씨를 묻어봅니다. 싹이 틔워진 일과 틔워지지 못한 채 사멸한 일에 대해서 생각하다가 이내 그만두기로 합니다. 그냥 모든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오늘도 얼굴에 난 뾰루지를 보다가 알게 되었거든요. 가끔은 뾰루지도 사랑해 보아야 하는 것 같아요.
며칠 전 정말 오랜만에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복슬복슬하게 볶아보았습니다. 단발인 채로 머리에 파마를 넣은 일은 아주 오랜만이라 기대 반 걱정 반이었지만 이제 날 조금은 아는 나이니까 괜찮을 거라 여기며 설렘을 더 갖기로 합니다. 단발에 들어간 파마는 복슬복슬 아주 마음에 들게 나왔습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조금 촌스러운 것이, 그리고 오래된 것이 좋았습니다. 중학교 때 부 활동으로 도자기를 굽고 사물놀이를 배운 것도 그런 까닭인가 이제 와 생각하니 아구가 딱딱 맞는 것 같습니다. 오래된 것들은 덜 명랑하고 더 수줍습니다. 촌스러운 것들은 다정함이 더 도드라지지요. 나는 수줍고 다정한 것이 좋아요. 파마한 내 모습이 수줍고 다정해 보이는 것 같아서 마음도 그렇게 되는 것도 같았습니다.
머리를 하면서 예전부터 친한 미용실 동생에게 미주알고주알 나의 이야기를 떠들었습니다. 동생은 아주 친절하진 않지만 따뜻한 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삶과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곧 잘 들어주거든요. 사람이 나와 뜻이 다른 이야기를 듣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데요. 나는 동생이 내 이야기에 짜증을 내는 모습도 좋습니다. 애정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나는 감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사람들을 좋아해요. 그런 사람들은 손해 보는 일이 아주 많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표출하고 싶은 만큼 표출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나쁜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무서운 것은 교묘함이니까요.
머리를 하면서 언제나 여자들끼리 있으면 나올 법한 사랑과 연애 이야기를 하면서 동생에게 의외의 말을 들었습니다. 예전에는 저렇게 사랑에 온 힘을 다하는 언니가 이해되지 않았는데, 생각해 보니 살면서 그렇게 마음 쓰는 일도 해볼 법한 것 같다고. 동생은 나와는 다르게 자신의 결정에 확신하고 지난 것들에 뒤돌아보지 않는 편입니다. 그런 동생에게 들은 말은 나를 놀라게 했지요. 나는 또다시 올해 믿고 있던 문장을 떠올려 봅니다. 생은 언제나 당신을 보고 있다는 말을요.
나이를 먹는 것은 슬프지 않은 데 나이를 먹으면서 서로 불편한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이 정답인 것처럼 사는 것은 슬프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어릴 때는 다투더라도 왜?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나누며 싸우듯 이야기하던 친구들이 많았는데. 무의미한 토론이 끝나면 언제 논쟁했냐는 듯이 똥과자를 먹으러 가고 놀이터에서 흙장난이나 하던, 하늘이 노을로 붉게 물드는 것을 보고 헤어지는 시간을 정하던 친구들이 있었는데요.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서 어쩌면 나를 지키기 위해 조금씩 서로를 포기해 가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 마음을 갖고 싶어요. 늘 부딪히는 일은 어렵고 불편합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미소로 응대하는 일이 어른스러움이라면 어른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애써 듣고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모두 다 타인의 사연을 듣지 않고서 끄덕임만 해버린다면 너무 매정한 것이 아닌가. 그리고 나는 좀 질척거리더라도 매정하고 싶지는 않은 사람이거든요.
어제 요가 수련을 마치고 선생님께서 해주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어떤 일을,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그것은 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닌 나를 위한 일이라고요. 아무 잣대도 들이대지 않고 그대로 바라보는 힘은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요.
그러기 위해서 나를 버리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나의 시선과 잣대로 누군가를 보는 일에 지쳤거든요. 나를 지키는 일보다 당신들을 사랑하고 싶어요. 당신들을 사랑해서 또 나를 사랑해 내고 싶죠.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 당신과 나와 세상을 보는 훈련을 아주,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복슬복슬 한결 다정해진 머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