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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요 Sep 29. 2024

연속된 고난은 어쩌면 ‘버프’ 같은 것

가을비라기엔 조금은 폭력적으로 느껴질 만큼의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나는 단독 주택의 이층에 살고 있습니다. 주택의 이층은 비가 오면 빗소리가 천장을 통해 그대로 전달된다는 장점이 있지요. 빗소리를 좋아하는 나에게만 장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의 비는 후두둑이 아닌 쿠구구궁 하고 대포 소리 같은 것이 납니다. 그야말로 요란법석인 가을비입니다.     



올해 나는 신체적으로도 마음으로도 연속해서 다치는 일이 많았습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봄, 발을 헛디뎌 계단에서 구르면서 머리에 커다란 땜빵이 생겼습니다. 피멍이 들었던 자리는 딱지가 졌다가 아물면서 머리카락을 가져갔지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만져본 나의 두피는 반들반들했고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아주 느리게 머리가 다시 자라면서 밋밋하게 만져졌던 두피가 보슬보슬하게 차오를 때쯤 원인 불명의 복통이 찾아왔습니다. 그 복통은 공식 없이 찾아왔고 여러 군데의 병원에서 온갖 검사를 해보아도 원인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나는 한의원에서 생애 처음으로 한약을 지어먹었습니다. 이십오만 원의 한약이 다소 비싸다고 느껴지면서도 복통으로 인해 한없이 추락한 생활의 질을 다시 회복할 수 있다면 싸게 친다고도 여겼습니다. 한약의 효과인지 대학병원에서 말한 ‘신경성’의 원인이 사라진 것인지 복통은 한약을 다 먹을 때쯤 나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복통이 사라지니 이제는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이가 부러졌습니다. 씹을 것도 없는 아이스크림을 먹다 이가 부러지다니요. 또 큰돈을 들여 치과에 가야 했습니다.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툭 하고 깨진 이를 뱉을 때쯤엔 어이없음에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이쯤 되니 병원이 아니라 무당집을 찾아가야 하나 싶을 지경이 되었지요. 며칠 전 엄마가 대뜸 전화가 와서 “네가 내년에 삼재란다. 몸 조심하거래이.”라는 당부를 했습니다. 나는 올해가 삼재 아니냐고. 부적이라도 써야 할 것 같다고 투덜거렸습니다. 어제는 내가 힘들 때마다 찾아가는 L교수님을 만났습니다. “교수님, 이번 가을비가 오면 바짝 추워진대요. 어서 추워지고 올해가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 더 이상 다칠까 봐 무서워요.”라는 나의 말에, 교수님은 나이가 있는 사람 앞에서 무서운 소리 하지 말라고 웃으셨습니다. 무신경한 소리를 한 것 같아 나는 조금 머쓱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피부로 느끼고 몸으로 겪는 체험을 하는 것은 마음과 생각으로 느끼는 것보다 더 큰 깨달음을 주기도 합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달리기도, 요가도 가지 못해 책을 읽다가 문득 잃은 것만 가득한 한 해가 맞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올해부터 운동량이 늘어나면서 부쩍 근육을 붙이는 것에 관심이 많아졌습니다. 근성장과 관련된 여러 유튜브와 정보들을 찾아보다 더 이상 못할 것 같을 때 조금 더 하는 것이 성장의 시작이라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하는 운동이 진짜 나의 힘이 되는 것이라고요.



어떤 고통은 부상으로 멈춤을 만들기도 하지만 어떤 고통은 새로운 문을 열어주기도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고통의 경험은 오롯이 내 것이어서 누군가와 공유할 수 있는 감각은 아니겠지요. 어떤 사람의 곁에 있기 위해 숨어서 울었던 긴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생각하는 일은 통각이 도드라진 일이었지요. 그 사람이 살았던 삶과 혼자 버텨냈던 긴 시간을 생각하다가 이내 사랑이 되었지요. 누군가의 삶을 마음 아파하다가 사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사람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으로 힘든 사람은 들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 곁에서 나는 늘 눈가가 붉거나 또 붉어지거나 했기 때문에 주변 사람에게 한 마디씩 들어야 했습니다. 그건 사랑이라 할 수 없는 거라고. 왜 사랑을 하는 데 버티냐고.

지금에 와서는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때의 나는 그랬어야 했다는 것 말고는 설명할 길이 없지요. 사랑은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니까요. 그 사람은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갔고 나는 남겨졌다는 것. 그리고 남겨진 마음을 어찌할 바를 몰라 뛰게 되었다는 것, 뛰면서 그 통각을 온전히 받아내는 수개월을 보냈다는 사실만 남게 된 것 같습니다.


      

빗소리를 들으며 돌아본 한 해가 통(痛), 이라는 한 글자로 표현되는 것 같습니다. 많은 밤을 그를 생각하며 납작해졌던 것, 납작해진 나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주먹을 쥐다가 내가 주먹으로 들어가 밤톨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그리고 산을 달리며 울음을 참고 요가를 하면서 잊어버렸던 숨결을 세던 것, 세던 숨결 끝에 머무는 마음을 떨쳐내기 위해 속으로 자꾸만 침잠해 갔던 것. 모든 것이 통각으로 환산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아픔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고통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여 덮어버리지 않고 마주했던 것이 지금 ‘진짜 힘’이 되어 속에서 활달한 치어가 되어 헤엄치고 있는 것이 느껴지거든요. 나는 잘 아팠다가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디 가지 않고 여기서 말입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들은 연속된 시련을 마주합니다. 이야기는 주인공에게 시련이 빠진 성장은 있을 수 없다는 듯이 극심한 고통의 사건을 서사하지요. 마침내 ‘흑화’한 주인공은 조금 더 단단해진 눈빛과 굳어진 다짐으로 마침내 자신만의 행복과 성장을 이루어 냅니다. ‘마침내’가 좋은 것 같네요. 그래요. 여전히 다칠 것을, 잃을 것을 생각하면 무섭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도망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사람을 보내고 힘들어하던 내게 친구가 다시 또 그런 사랑이 오면 할 것이냐고 묻더라고요. 나는 바로 대답했지요. 나는 한다고. 그런 사랑을 해서 조금은 사랑에 대해서 알 것 같아진 내가 여기 있으니까 또 하겠다고.  


   

올해 몸과 마음이 그렇게 다친 것은 나에게 찾아온 주인공 시련인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남은 한 해도 잘 버텨보겠습니다. 그러면 ‘마침내’ 나에게도 주인공 버프처럼 해피엔딩이 올지도 모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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