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의 한 일터에서 S가 내게 호감을 드러냈을 때, 나는 반감을 표하며 비혼주의자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내가 비혼주의자여도 상관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연애 따윈 필요 없었다. 잘못된 연애에 지쳤고 혼자 있는 생활에 만족했다. 주 55시간 정도 일을 했기에 나만의 시간은 적은 듯했으나 나는 그 시간을 아주 잘 보냈다. 때론 혼자 때론 친구들과. 단조롭고 반복되는 나날들이었지만 그때까지의 삶 중 가장 안온한 상태였다. 그러나 방어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해서 내게 다가왔다.
어느 날 그는 말했다. “연애가 필요하지 않을 때 연애를 한다면 그게 가장 좋은 거 아닐까. 연애를 하고 싶은 어떤 이유가 있고 그게 관계를 통해 해소된다면 결국 연애를 할 이유가 사라지는 거니까. 연애를 할만한 이유가 없을 때, 나 혼자만의 삶으로도 충만할 때, 그때 연애를 한다면 그건 또 하나의 행복이 될 거야.” 사탕발림의 말로 굳게 닫혀있던 마음의 문이 조금씩 열리게 되었다. 처음 해보는 이제까지와 다른 연애의 시작이었다.
그와 연말 불꽃놀이를 보러 갔을 때였다. 번잡하고 시끄러운 곳을 싫어하는 나는 가길 망설였지만 기대하는 그의 모습을 보니 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가보니 역시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한껏 치이고 괜히 왔단 생각이 들어 심술을 부렸다. 그는 차분하게 나를 타일렀다. “짜증 나는 상황이 와도 조금이라도 여유롭고 유쾌하게 흘려보내자. 어쨌든 우리의 삶은 계속되니까.” 그 순간 불꽃이 터졌다. 찌푸렸던 나의 얼굴에도 미소가 퍼졌다. 그와 함께라면 싫어하는 것을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내 세계에 들어오니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점차 바뀌게 되었다.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나와는 다르게 그는 주변을 둘러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큰 행복을 좇는 나와는 다르게 그는 사소한 재미를 발견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예측불가능한 모든 것에 불안을 느끼고 감정적인 나와는 다르게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유연하고 이성적이었다. 그에겐 배울 점이 참 많았다. 이제까지 내가 어떻게 살아왔나 싶을 정도로 나는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그는 내게 상대를 이해하는 법을 알려줬다. 존중하는 법을 알려줬다. 또, 성숙하게 소통하는 법을 알려줬다.
언젠가 S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가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S는 딱 좋을 때 만난 거였다며 그때의 우리가 만났으니 지금의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거라고 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모든 순간은 선택의 연속이었는데, 지금 널 이렇게 만나고 있는 건 그 선택들에 따른 결과일 뿐일까, 아니면 지금 널 이렇게 만나려고 그런 선택들을 해야만 했을 운명이었던 걸까. 사랑은 우연으로 찾아오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를 만날 수 있음에 다시 한번 감사했다.
즐비한 사랑 노래, 사랑 영화, 사랑에 대한 시, 널린 게 사랑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사랑은 너무 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사랑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애가 필요하지 않다고 했던 과거의 내가 무안하리만큼 우습게도 난 그냥 우리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를 사랑하니 나를 더욱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고 가족, 친구, 이웃, 이름 모를 꽃과 나무들, 파란 하늘과 구름, 푸른 밤의 별과 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법을 깨닫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