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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네 채소 농장

방콕 상추쌈은 언제나 만족

by 루미상지


해뜨기 전 산책길에 나선다. 수로를 따라 걷는데 뒤쪽에서 새벽의 여명을 뚫고 맑은 목소리가 들린다.

“사왓디 카~~”

누구지? 뒤돌아보니 채소농장 할머니가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며 손을 흔든다. 나도 손을 흔들어 인사한다.

“사왓디 카~~”

채소농장은 우리 집에서 걸어 10분 거리에 있다. 일주일에 1~2번은 이 농장에 와서 채소를 산다. 이제 단골이 되어 할머니 할아버지와도 친하다.


두 분이 밭을 갈고 각종 유기농 채소를 재배하는 샐러드 농장이다. 농약이나 비료는 쓰지 않고 퇴비도 직접 만들어 사용한다.

산책하다 우연히 이 농장을 발견했다. 마히돌 대학교 살라야 캠퍼스는 큰 호수가 있을 정도로 아주 넓다. 하지만 그 안에 농사짓는 밭이 있고 채소를 파는 가게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조그만 가게는 농장 옆에 붙어있다. 하지만 낡고 어두워 잘 보이지 않는다.


채소밭


어느 날 산책하다가 이곳에서 채소를 사 가지고 나오는 사람을 만났다.

“여기서 채소를 살 수 있나요?”

“그럼요. 친환경 유기농으로 재배한 채소입니다. 바로 샐러드로 먹을 수 있어요."

그때부터 단골이 되었다. 싱싱하고 맛있는 채소 샐러드가 먹고 싶으면 바구니나 에코백을 메고 가면 된다. 값도 아주 싸다. 멀리 시내에 사는 친구들은 방콕에 그런 곳이 어디 있냐며 부러워한다.


오늘도 나는 재사용할 비닐봉지와 고무밴드를 에코백에 넣어 메고 할아버지네 농장에 간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웃음으로 반갑게 맞이해 준다. 가게 안은 바깥보다 더 어둡다. 두 분은 해뜨기 전 출근해 채소를 가꾸고 팔지만 어두컴컴한 가게에 전깃불을 켜지 않는다. 할머니는 말한다.

"불 안 켜도 다 보여. 불 켤 필요 없어. 전기세만 나오지."

딱 내 스타일이다. 나는 할머니 말이 맞다며 두 손으로 엄지 척을 해 드린다.

할아버지는 밭으로 나갈 채비를 한다.


지난번 뿌렸던 싹들이 벌써 올라왔다. 이 밭에서는 따뜻한 날씨로 일 년 내내 유기농 채소를 재배할 수 있다. 다 수확해서 팔고 나면 또 씨를 뿌리면 된다.

할아버지가 오늘은 무슨 채소를 살 거냐 묻는다. 상추와 고수, 갓, 쪽파를 주문한다. 로메인 상추를 제일 좋아하지만 우기 때는 재배가 안 된다고 한다. 로메인이 없을 때는 중국 상추나 중국 배추를 사기도 한다. 포기 배추가 아닌 경종배추, 서울 배추를 이곳에선 중국 배추라고 부른다. 모두 바로 샐러드로 먹을 수 있다.

할아버지가 칼을 들고 밭으로 간다. 나도 뒤따라간다. 내가 손가락으로 상추를 가리킨다.

“이거 좋아요. 이것도요.”

할아버지는 내가 가리키는 상추를 칼로 포기 채 벤다. 가게 할머니에게 가져오자 할머니는 비닐봉지에 낱개 포장을 하려고 한다. 가지고 간 에코백을 내밀며 말한다.

“포장 안 하셔도 돼요. 그냥 여기에 담아주세요.”

할머니가 옆에 있던 무를 가리키며 사라고 한다. 그런데 무의 모양이 이상하게 생겼다. 몇 년 전 남편과 내가 처음으로 농사지었던 무처럼 울퉁불퉁 못생겼다. 못난이 무도 하나 들고 왔다. 무는 채 썰어 생채를 만들어야겠다.


외식문화가 발달한 태국에서는 비닐봉지를 아주 많이 사용한다. 비닐봉지와 고무밴드를 이용한 포장술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완벽하다. 태국 친구는 말한다.

“마시다 남은 콜라도 비닐봉지에 포장해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완벽하게 가져올 수 있어요.”


배달 오토바이와 도시락 비닐봉지를 들고 출근하는 사람들


우리는 방콕에 와서 한국에서보다 외식을 자주 하고 있다. 남은 음식을 포장하거나 포장해 온 음식을 집에서 먹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포장했던 비닐봉지와 고무밴드가 아주 많다. 나는 비닐봉지를 버리지 않고 깨끗이 씻어 말리고, 고무밴드도 모아 두었다가 할머니께 가져다 드린다.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몹시 좋아하며 알뜰하다고 칭찬해 준다. 하찮은 것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재사용하시는 할머니가 나는 더 고맙다. 우리들은 서로 마음이 맞는 친구다.


기분 좋은 마음으로 상추 가방을 메고 돌아오는 길 어디선가 좋은 꽃향기가 난다. 가던 길을 멈추고 두리번거리며 꽃향기를 따라간다.

저 앞에 재두루미가 물속을 한참 노려보더니 ‘콕’ 물고기 한 마리를 낚아채 하늘로 날아오른다. 이곳에는 두루미도 많고 물고기도 많다. 도요새를 닮은 새들은 물가에서 우렁이를 잡아먹는다. 풀숲에는 우렁이와 달팽이 빈 껍질이 많다.


짝짓기 철인지 새들이 둘씩 짝을 지어 쫒고 쫓기듯 나뭇가지를 넘나 든다.

20분이면 다녀올 농장을 이것저것 구경하며 해찰 부리느라 1시간 30분이나 걸렸다.

나랑 같이 오늘 이곳에서 살고있는 꽃과 나무, 새들을 본다. 기분이 참 좋다. 행복이 차오른다.


농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만난 친구들


룰루랄라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채소를 씻는다.

기다리던 남편이 왔다. 서둘러 준비해 둔 삼겹살을 굽는다. 상추에 갓을 넣어 싸 먹는다. 갓의 톡 쏘는 매운맛에 코가 찡하고 눈물이 난다. 이번엔 상추에 고수를 넣어 싸 먹는다. 고수의 강한 향이 입안 가득 퍼진다.

우리 둘 다 터질듯한 입으로 말은 못 하고 눈짓으로 웃으며 고개만 주억 거린다.

방콕의 싱싱한 채소 쌈은 일 년 내내 먹어도 만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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