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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뜰에바다 Jul 27. 2024

산소 같은 사랑, 마셔라

내가 만난 신의 이름은 '산소 같은 사랑'이다. 그 사랑으로 나는 날마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누린다. 변곡점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을까, 아찔하기조차 하다. 신의 사랑이 연인끼리의 사랑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말라. 똑같다. 기쁨이다. 행복이다. 에너지다. 그리고 그 이상이다. 결코 부족함이 없으며, 언제나 차고 넘치는.... 사람 사랑은 얼마나 배고프고, 갈증이 많은가!     


낭만가객 송창식의 ‘사랑이야’ 노랫말을 보면 가슴을 따뜻하게 하는 낭만과 충만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나왔지만, 나는 그보다 더한 사랑 노랫말을 찾을 수 없다. 그가 언젠가 방송매체에서 종교를 가진다면 불가의 승려가 되었을 것이라는 말을 빌리면 그는 신 사랑이 아닌, 사람 사랑을 그토록 천재적인 감성으로 지어서 노래한 셈이다.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내 마음 깊은 거기에 찾아와

어느새 촛불 하나 이렇게 밝혀 놓으셨나요.

어느 별 어느 하늘이 이렇게

당신이 피워 놓으신 불처럼

밤이면 밤마다 이렇게 타오를 수 있나요.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한 번은 본 듯한 얼굴

가슴속에 항상 혼자 그려보던 그 모습

단 한 번 눈길에 부서진 내 영혼

사랑이야 사랑이야 음     


당신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내 마음 깊은 거기에 찾아와

어느새 시냇물 하나 이렇게 흘려 놓으셨나요.

어느 빛 어느 바람이 

이렇게 당신이 흘려 넣으신 물처럼

조용히 속삭이듯 이렇게 영원할 수 있나요.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한 번은 올 것 같던 순간

가슴속에 항상 혼자 예감하던 그 순간

단 한 번 미소에 터져 버린 내 영혼

사랑이야 사랑이야 음   

  

그래서인지, 나는 그의 노랫말에서, 나에게 다가오는 산소 같은 신의 사랑을 느낀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말들로 그 사랑을 토해 놓았음에도, 쉽게 다가오는 그의 말들이 오히려 더 명료하고 명쾌하다. 그렇다면 누가 신을 찾는가? 나약한 사람들이나 신과 함께 하는가?

'International Bulletin of Missionary Research'에서 올 2024년 1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세계 인구는 81억 1,883만 6천 명이다. 그중 종교 인구는 72억 2,581만 5천 명, 무종교 인구 8억 9,302만 1천 명이다. 무종교인 가운데서 불가지론자는 7억 4,671만 5천 명, 무신론자는 1억 4,630만 6천 명이다. 

그중 4대 종교 분포만 보자. 기독교인은 26억 3,194만 1천 명, 무슬림은 20억 2,973만 3천 명, 힌두교도는 11억 1,701만 6천 명, 불교도는 5억 3,425만 5천 명이다. 이 통계에 의하면, 세계 인구의 약 90퍼센트가 종교를 가졌다. 완전 무신론자는 전체 인구의 1.8퍼센트에 불과하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마음 한 구석에 신의 영역이 있어서, 신으로 채우지 않으면 안 되는 사실이, 세계 종교 인구 분포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세계 둘째 종교로 20억 이상의 사람들을 항복시킨 '알라'는 다산으로 수많은 젊은이들을 거느리고 있지만, 테러 등 절대적인 희생을 강요한다. 세계 셋째 종교로 자리매김한 힌두교의 '3대 주신들'은 범신론적 초월과 명상 등으로 사람들에게 있는 신의 영역을 인본주의로 채운다. 세계 넷째 종교로 사람들을 이끄는 '부처'는 엄격함으로 이것도 저것도 금하고, 스스로 알아서 깨달으라고 버려둔다. 


나의 신은 아니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하여 신의 옷을 벗었다. 사람이 되었다.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모든 사람의 죄를 품고 죽음으로 나아갔다. 지금은 나의 안팎에서 나와 더불어 호흡한다. 그것은 숱한 그리스 신화 속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오롯한 사랑이다. 사람이 개미를 사랑해서 장마폭우 예보를 하려고 하되, 개미가 듣게 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사람이 개미가 되는 것밖에 없다면, 그대는 그렇게 할 수 있는가?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신이 사람이 된, 그 사랑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사람의 정체성은 사람 자신에게서 오지 않는다. 사람의 사람 된 것은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사랑 자체인, 불변하는 신으로부터다.


신을 만나기 전, 나는 ‘사랑은 받아본 자만이 할 수 있다’는 이상한 말 때문에 힘들었다. 사랑을 충분하게 받아보지 못했다는 자각에서였다. 7세에 아버지를 잃고 극빈자의 생활을 한 것이 한몫했다. 돌이켜보면 단 한 번도 굶은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몸이 부서지게 일하여 지붕을 만들어 주었다. 그럼에도 아버지의 부재가 나의 성장에 큰 수렁과 웅덩이를 만들었다. 어머니의 피나는 사랑이 반쪽 사랑일 뿐이었다. 나의 산소 같은 신의 사랑이 내 안에서 촛불이 되고 시냇물이 되어 출렁이기 전에는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의 졸저《예수와 함께 복음서 읽기》(부크크, 2022)가 태어났다. 조용히 다가오는 산소 같은 사랑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슴에 촛불이 켜지고 시냇물이 흘러넘쳐 폭포수가 되어 주체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것을 수차례 양동이에 받아냈다. 


산소 같은 사랑, 마셔라. 단언하건대, 아직 산소 같은 사랑을 그대가 마시지 못한 것은 낯설어서다. 잘 알지 못해서다. 꼭 알려고 하지 않아서다. 산소 같은 그 사랑, 그냥 가볍게 받아 마셔라. 숨이 골라질 것이다. 앞으로 생애 가운데 산소가 필요한 호흡 곤란은 아예 없을 것이다. 인류 역사 안의 수많은 지성들의 샘의 근원이 어디였는가? 주옥같은 그들의 작품들이 무엇을 배경으로 하였는가? 지금도 사람들 발길이 끊이지 않는 미술이나 조각품들이 산소 같은 그 사랑을 말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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