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의 약속이 생겼어

by 홍미


아빠는 가끔 우리 집에서 잠만 자고 나간다는 의미로 나를 하숙생이라 놀리시곤 했다.

그만큼 평일이든 주말이든 대부분의 시간을 밖에서 친구들과 보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매번 만날 때마다 큰 이벤트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소소하게 떠드는 그 시간이 내겐 힐링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내는 법을 잘 몰랐던 것 같기도 하다.

가끔 혼자 쇼핑을 하거나 책을 읽기도 했지만, 그 시간을 매번 꼭 가져야 한다는 마음까진 없었다.

서른이 되고 나서 이런 마음이 들기 시작한 건, 우리들의 인생 노선이 갈리기 시작했던 시점이었다.


사업을 시작해 생활패턴이 서로 달라진 언니, 어학연수를 떠난 지인, 결혼 준비로 바빠진 친구들,

그리고 오래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곳으로 이직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는 나까지..

20대에는 크게 다를 바 없이 대부분 직장인으로 지내왔지만, 이제는 서로 제 갈길을 찾아 나서고 있었다.


자연스레 혼자 보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덕분에 내가 나를 알고 가꿀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가장 먼저 바뀐 건 퇴근 후 친구들과의 술자리를 가지는 대신 헬스장에서 무게를 친다는 점이었다.

퇴근 후 운동이 쉽진 않았지만, 오히려 몸을 쓰면서 잡생각이 사라지니 온종일 피로했던 정신이 맑아졌다.

주체적으로 식단을 짜고 운동 루틴까지 계획하며, 지금은 운동이 내 일상에 자연스레 자리 잡게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 취미를 물었을 때, 조금 웃기지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청소라는 취미도 새로 생겼다.

집에서 하숙생으로 불리던 시절엔, 최소한의 청소와 정리만 하고 살았던 내게 정말 신박한 취미가 생긴 거다.

신나게 욕실 청소를 하고 침대 시트까지 정리하고 나면, 내 근심걱정까지 다 털어낸 듯 홀가분해졌다.


혼자 있는 시간엔 내가 그때그때 하고 싶은 것들을 방해받지 않고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즐거웠다.

비단 꼭 공부를 하거나 무언가를 이뤄야만 하는 시간이 아니라, 당장 내가 끌리는 걸 해도 되는 시간.


오늘은 날씨가 선선하니 무작정 이어폰을 꽂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산책하러 나가는 날.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 속에 있는 하늘은 얼마나 예쁜지 사진을 마구 찍어대던 날.

나에겐 어떤 메이크업이 좀 더 어울리는지 뷰티 유튜브를 보며 몇 시간 동안 신나게 화장하던 날.

삼십 년 인생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떠나 오션뷰 호텔에 묵으며 실컷 책을 읽었던 날.


서른이 되어서야 깨달았지만, 이제라도 이런 재미가 내 인생에 추가되어 진심으로 즐겁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나와의 약속을 잡아본다!

토, 일 연재
이전 02화눈 떠보니 서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