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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난사람 Aug 09. 2024

여섯 번째 집: 서울의 친정 살이 (2)

익숙하거나 새로운 인연

친정 집은 우리가 살던 아파트와 같은 생활 반경 내였지만 합가를 하면서 우리의 주변 사람들은 꽤 크게 바뀌었다.


우선 가족 구성원이 나와 우탄이, 숭이 셋에서 엄마, 아빠, 노견 가루까지 여섯 명으로 늘었다. 나로서는 엄마, 아빠와 가루와 함께 산 세월이 따로 산 세월보다 훨씬 길었음에도 8년 만에 함께 살려니 새로운 면이 많이 보였다. 60세가 다 되어 가도 슬렌더 체형을 유지하는 우리 아빠는 모든 음식을 반만 먹고 남겨놓는 습관이 있었다. (그래서 숭이가 '반반 할아버지'라는 별명을 붙여 드렸다.)  맥시멀리스트인 우리 엄마는 가족 중 누군가 뭐를 잘 먹으면 대용량을 종류별로 사다 놓고 아는 사람이 뭔가를 팔거나 추천하면 한 박스씩 들여놓았다. 벌써 만 17세가 된 우리 가루는 강아지 사료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사람 음식을 줄 때까지 버티는 습성이 생겨 있었다.

반반 할아버지의 흔적 / 아빠가 치즈를 좋아하면 생기는 일



나는 아빠가 반 남겨놓은 초코바를 보며 나잇살이 찌지 않으려면 역시 소식이 답이라는 걸 배우고 엄마가 대량으로 사다 놓은 과일을 숭이와 실컷 먹으며 이 집에 서서히 적응해 갔다. 그리고 무엇보다 앞으로 얼마나 더 함께할 수 있을지 모를 가루와 시간을 더 보낼 수 있음에 감사했다. 엄마와 2인 1조로 가루에게 수액을 맞히고, 그대로 남아있는 사료 그릇을 확인하고 '으이그'하며 단호박과 물에 만 쌀밥을 줄 수 있어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초동안 가루 할아부지




또 이 집에 살면서 독립한 엄마 아들들도 이전보다 자주 보게 되었다. 예비 신부와 신혼집에 살고 있는 큰 동생은 가족행사가 있을 때마다 본가인 친정으로 왔고, 지방에서 근무 중인 막내 동생은 주말마다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친정을 거점 삼아 서울로 올라오곤 했다. 덕분에 서먹하던 우탄이와 동생들은 축구 게임을 하거나 같이 야식을 시켜 먹으며 조금 가까워졌다. 숭이 역시 삼촌들의 웃통 벗은 몸을 보며 "내 눈!" 하고 도망갔다가도 웃으며 같은 소파에 앉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얼마 전에는 막내 동생이 숭이에게 생전 안 하던 책 선물을 했다가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을 들키기도 했다.) 우리 가족과 원가족이 자연스럽게 한 지붕 아래 생활하면서 이전보다 편하고 가까워진 것 같아 좋다.




이 집에 이사 오고 생긴 또 다른 인연으로는 우리 아파트의 초등 저학년 친구들이 있다. 요즘 아파트 놀이터에는 놀고 싶어도 친구들이 없다는데 이 아파트는 놀이터가 비어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 4층 애나, 14층 시아, 옆동 2층 연우 등 같이 놀 1, 2학년 아이들이 많다. 애들이 또 얼마나 허물이 없는지 숭이랑 놀고 싶으면 집 앞에 찾아오거나 인터폰을 하기도 한다. 숭이도 처음에는 놀이터에 가기만 하면 친구들이 있으니 심심할 때마다 나가더니 요즘은 놀이터 앞을 지나가다 걸리면 집에 못 간다며 숨어서 들어갈 정도다.


같이 수박 먹는 아이들 / 어느 비오는날 비 맞으며 우산 놀이


같은 반 친구네 집에 놀러 갈 때에도 엄마들끼리 연락이 필수이다 보니 친구랑 따로 노는 게 쉽지 않은 시절이다. 이런 때에 동네 친구들이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는 건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기 주도형 놀이와 갈등 해결을 배우기에 가장 좋은 것이 밖에서 많은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라고 한다. 우연히 들어와 살게 된 친정 집에 우연히 같은 시기에 숭이와 비슷한 또래가 많이 살고 우연히 그 친구들과 친해져서 매일 놀 수 있는 확률이 얼마나 될까? 숭이의 세대에서는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 문화를 1년 동안이나마 누릴 수 있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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