嘲笑(조소), 誹笑(비소)가 모두 비웃음을 표현하는 말이니 '웃음'이란 말은 모두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그게 웃음은 아니다. 아니, 웃음이라기보다는 모멸을 안겨 주는 지독함, 상대를 패대기치는 잔학함이다. 한편 웃음은 상대에 대한 친절, 호의를 표시하고 적대감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거기에서도 시선은 상대를 향해 있지 않다. 오히려 그 광경을 구경하는 제삼자, 주변에 맞춰져 있다. 그런데 비웃음은 웃음이 아니라서, 혹은 콧바람을 동반하는 업신여김이라 그럴까?
비웃음은 바라보는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상대에게 정면으로 적나라하게 꽂힌다. 웃음은 적의를 드러내지 않는 것을 전시하는 것이며 그것을 구경꾼이라는 매개를 거쳐 한차례 여과하는 과정이라 파장의 절반만 전달된다. 비웃음으로 바뀔 여지를 유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웃음은 거름망이 없다. 발화자의 살벌한 냉기가 그대로 상대에게 전달된다. 아니 그 이상이다. 수신자는 발신자의 독기 어린 모멸 외에도, 자신이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며 자신을 가학함으로써 필터 없는 감정의 파장을 고스란히 맞이하는 것이다.
웃을 일이 드물어서 비웃음이 만연한 것일까?
혹은 타인은 웃는 데 자신은 그러지 못하단 걸 자조하는 것일까?
혹은 관심받지 못해, 무료한 일상에서 분란을 일으켜 상대의 도발을 유도하기 위해 그러하는 것일까?
무기력한 삶에서 매운 맛나는 사태를 만들어 넣기에는 무심코 던지는 이 모멸 섞인 말 한마디가 적격이다.
그러면 홍수가 니서 강바닥을 다 뒤집어 놓듯, 오랫동안 가라앉아 있던 해묵은 과거사를 한꺼번에 수면 위로 떠올리게 하는 좋은 기회를 얻는다. 이런 비웃음의 표면에는 상대가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불신, 내가 겨우 이 따위 일이나 하고 사느냐는 등의 자신의 신세 한탄, 세상은 이렇게 굴러가야 한다는 것에 대한 어긋난 괴리감, 자신은 언제나 도덕적이고 부자 같은 이들은 부도덕하다는 적대감, 무능력한 걸 모르고 남을 원망질이나 해대는 빈자들을 향한 냉소..... 같은 게 이유가 되어 붙어 있다.
그 속에는, 현실은 웃음으로 위장하고 웃음으로 가라앉혀 위선적이라는 의식도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비웃음이 그것을 가리고 있던 웃음의 장막을 걷어내는 순간, 눈동자는 위아래로 콧구멍에서는 '헛'하는 헛바람이 인다. 마치 무대 위는 화려한 조명과 세트로 꾸며져 있지만, 그 뒤에서는 온갖 어수선한 것들로 어지럽게 널려 있는 것을 보는 것처럼. 비웃음은 아래를 향한다. 신체 동작도 그러하다.
look down처럼 아래를 쳐다본다. 세상을 끄집어 내린다. 위를 향하기만 하던 일이 무너져 내린다.
비웃음은 그것을 극복해야 할 현상으로 생각한다는 등, 작용 방향은 주로 부정적이다. 그러나 그것에도 커다란 가능성이 잠재해 있다. 비웃음이 위선을 벗겨내고 자신의 존재를 반성케 하는 긍정적 측면도 있는 것이다. 만약 이 넘어서야 할 모멸, 비웃음에 자리를 내줄 경우에는 존재마저 폐기된다. 하지만 비웃음을 거꾸로 비웃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빅웃음'으로 바뀔 수도 있다.
현대인은 정말 제대로 된 웃음을 웃을 일이 별로 없다. 서로가 치열한 경쟁관계에 있으며, 기성의 가치관은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유동사회라는 덕택으로 대중문화가 패권을 장악하고 있다. 기성의 가치관은 모두 해체되고 있다. 이런 세태하에 진정한 웃음은 실체를 잃는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대가를 지불하고 제작한 웃음을 사거나, 거래 관계를 원활히 하게 하기 위한 cctv아래의 쓴웃음이 있을 뿐이다. 어쩌면 자신이 생산해 내는 진정한 웃음은 비웃음뿐일지도 모른다. 한순간의 사회적 high profile을 내세우면서 부당하게 보이는 사회적 흐름에 제어 역할을 하는 것이 비웃음이라는 어설픈 몸짓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