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누락된 대상이 있다면 바로 '시선과 목소리'라고 한다. 사랑의 부분대상이라면 주로 유혹하는 신체 부분, 시각적 부분을 지칭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시선과 목소리도 상대를 유혹하는 매체가 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여기서 사랑의 실재를 시선과 목소리라고 하면, 눈으로 직접보면서 목소리를 듣는 것이 거짓말을 한다거나, 문서가 주인을 대리하는 참칭을 막고자 하는 것과 비슷하다.(이는 실제 의미하는 바가 아니라 제가 임의로 상상하는 것임을 밝힙니다. '사랑의 대상으로서 시선과 목소리'를 읽으신 분은 오해 마시길^.^;;) 그렇다면 사랑의 누락된 대상, 시선과 목소리는 물자체로서 그것이 도달하는 것은 진정성이다. 어떤 거짓이나 유혹의 말이 사랑을 매개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궁극의 실재는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랑의 반대에는 증오, 혐오가 맞선다. 사랑의 반대말로는 무관심, 편견 등을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이고 직접적으로는 증오, 혐오같은 것이라 생각되는 것이다. 무관심, 편견 따위는 사랑의 출발점이나 끝나는 지점에서의 맥락을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사랑 자체', 그러니까 저 사랑을 영원한 것으로 하는 것은 아마 진실된 마음, 태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단순하게 보아, 사랑의 반대편에 서있는 혐오, 증오 따위의 그 누락된 부분 대상은 '부진정성', '허위'라고 말할 수 있다. 누군가를 그렇다고 믿어왔던 신뢰, 기대 따위를 무너뜨려 버리면 상대에 대한 사랑은 허물어 진다. 물론 상대의 크고 작은 작위가 개입했음을 감지하고도 끝내 사랑을 지속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은 마침내 부진정성을 진실로 수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시선과 목소리가 사라지면 그 뒤로 진실이 출현하기 때문일 것이다. 혐오나 증오는 이같은 이면이다. 부진정한것, 정직하지 못한 것을 매개로 하는 것이 혐오, 증오이다. 사람들은 역겨운 이들이 내뱉는 말, 행동 등에 혐오감을 표현한다. 무엇이든 꼴보기 싫은 대상, 현상에 대해서는 증오를 드러낸다. 심지어는 무조건적인 사랑에 정면 배치되는 무조건적인 혐오도 있다. 종국적으로 혐오는 바라지 않는 것에 대한 폐기, 내가 믿고 기대하는 지향할 바, 어이없으며 거짓말같은 과잉 따위에 대한 거친 반발로 나타날 것이다. 그건 아마 주관적 편견이 깊게 개입해 세계의 부진정함에 반발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딱하게도 그런 혐오가 정치가 되고 경제, 문화의 바탕이 되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현실 정치인 중에는 참으로 혐오스런 막말을 쏟아붓는 존재들이 많다. 또 매일의 가십란에는 적나라한 반발감을 이용하는 내용도 있다. "관심없는 데 왜 이딴 걸...." 하는 댓글을 보면 이때는 사랑의 반대말이 무관심이기도 해 보인다. 무관심을 관심내지는 엿보기로 유도하니까. 그런데 혐오는 이런 진정성이 감춰진 부분을 수면위로 부상시켜 허위나 부진정성이라는 잉여를 소비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릇되었다고 보이는 세상의 진행 방향을 혐오로써 제어한다고 곧게 펴지는 것은 아니다. 특히나 이유없는 혐오는 그렇다. 그냥 싫다는 데에는 근저가 없다. 그것은 바탕이 없음으로 인해 그렇다. 이유있는 혐오일 것 같으면 차라리 적대가 낫다. 이 무한히 기울어진 세상에 브레이크 장치를 통해 변증법적으로 지양할 무엇이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혐오와 적대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해 대상에 마구 오물을 투척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삐딱한 시선과 잡음을, 진정한 시선과 목소리에 되돌려 주는 일이 혐오를 적대로, 또 다시 그것을 사랑으로 돌려 놓는 일일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