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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stit Oct 02. 2024

감정의 꼴들 - 불안감

까닭 모를 불안이 덮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걱정거리가 있어 그 사태가 실제 발생할지도 모르는 것에 우려하는 것이야 자연스러워 보인다. 그런데 불안이라는 것이 막연히 나타나는 경우가 문제이다. 무의식의 심연을 헤쳐보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겠지만, 그 깊은 곳을 속속들이 쳐다볼 수 있는 건 아니다. 물론 본능적 현상이라고 말해도 설명하지 못할 건 아니다. 길을 가다가, 잠을 자다가도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알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오랜 인류 역사에서 인간은 자연의 이 알 수 없는 위험을 예비해야 했으니, 유전자에는 이를 경계하는 심리가 선험적으로 새겨진 것이라고.

그것 말고도 인간은 빈 것을 두려워하는 막연한 심리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공백이 주는 공포에 사람들은 어떤 위험이 있는 지를 그려 넣는다. 칠흑 같은 밤을 혼자 걷는다면, 두려움을 지우기 위해 마음속에서 온갖 방어물을 상상하지만,  그보다는 귀신, 유령 같은 오히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를 먼저 그려 넣는다. 자신을 한껏 긴장시킨  다음, 서서히 공포에 적응하려는 태도였을 것이다. 어차피 인간이라는 존재는 대자연에 비하면 그리 견고하지는 못하다. 그래서 마음은 유동적으로 흘러내린다. 유령이라는 상상물이 흐느적거리는 것도 그런 심리 상태가 흘러내린 현상이 아닐까?
그래서 불안한 그 공간을  악착같이 메꾸는 것이 사람의 활동이라고 하면 어떤가?
마침 실존주의에서는 "즉자와 대자 사이에 선험적인 무가 있으며 따라서 주체는 존재와 비존재의 불일치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는데 이러한 모순을 하나의 의식 속에 통일시키려는 노력 속에서 인간이 자신의 실존(불일치)에 불성실한 존재로 살아갈 때 불안이 발생한다"라고 말한다
[위키백과]
그러면 불안은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것으로, 그것을 완화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불안은 마치 유령처럼 우리 곁을 떠도는 모양이다.
이  알 수 없는 것을 들춰내어 우리는 알지 못하는 것으로 맞선다. 소환하지 않으면 그만인 데, 모순적으로 일상이 권태로운 것, 무력한 것, 무기력한 것을 견뎌내기 힘들어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그런 선험적인 공백을 무얼로 그 간극을 메꾼다는 것인가?
무기력한 것을 보충하려는 것에서 새로운 무력함이 발생하는 것이니, 그 또한 불가능성이다.
우리가 실존이니 뭐니 하는 것도 사실은 그게 뭔지도 잘 모른다. 다만 유령 같은 잣대를 두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불안이라는 유령은 끝없이 나타나는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현상으로서의 불안.
이제 그것을 제거하는데 무력함을 느끼기보다는, 사람이 사는 한에서는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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