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 내게 다가왔다. 어깨가 잔뜩 내려앉아 축 늘어졌다. 어쩐 일로 그렇게 힘이 빠졌느냐고 묻는다. 아무 말이 없다. 그러다가 마지못한 듯 한마디 꺼낸다. "기쁨이가 오지 않아서인지 사람들이 나를 싫어해." 사람들이 기다리는 건 기쁨이인 모양이다. 하지만 기쁨이는 바쁜 애이다. 그러니 기다리는 사람들에겐 마주치는 일이 드물다. 슬픔이는 사람들에게 자주 오지만 어째 별로 반기지 않는다. 아예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사람들은 원하지 않지만 슬픔 이를 더 자주 부르는 것을... 그래서 슬프다. 오기를 바라지도 않으면서는 이래저래 불러 놓고는 아니다고 하면서 밀쳐 내니 말이다. 아예 혼자 문전박대를 당하느니 기쁨이와 함께 방문하려 해도 사람들은 떨어져 다니라고 하거나 얼씬도 하지 말라고 그런다. 내가 가는 곳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어제는 상가라는 곳에서 나를 찾아갔더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잦아 왔다. 하나같이 말없이 눈물을 흘리거나 고개를 숙이고는 무슨 말인가를 건넨다. 이러다가는 내가 죽을 지경이다.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사람들은 밤새 나를 찾는다. 나는 이만하면 됐으니 이제 기쁨이에게 이 사람들을 만나보라고 해도 아직은 소용없다.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밀쳐낼 일을 만들어 나와 분리하려고할 것이다. 조금은 속이 상한다. 만약 내가 없었다면 "아이고 우리 어머니! 평생 편하게 다리 한 번 뻗지도 못하고..." 하면서 마지막 작별의 순간이라도 맞이했으려나! 기쁨이는 생전에 좋은 친구였지만 악역은 내가 다 맡았다는 게 억울하다. 누군가는 슬픔이 더 큰 에너지로 승화한다고 칭송해 주기도 하지만 그건 시적 세계에서나 통하는 말인 것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나 때문에 밀리언 디스크나 천만 조회를 기록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또 남이 흘리는 눈물에 공감해 이웃에게 사랑으로 돌아선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가? 시인은 어떻고? 가을 낙엽 떨어지는 쓸쓸함에 기대어 불후의 시를 남긴 시인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이런 면에서는 기쁨이 보다는 더 큰 예술적 영감을 퍼 날라다준 나 자신을 칭찬하고 싶다. 그러나 사람들이 일부러 나를 찾지는 않는다. 기쁨이는 보이지 않아도 애써 찾지만 나는 일부러 찾아가도 핍박을 받는다. 기쁨이도 나처럼 슬퍼할 줄 알까? 그에게 물을 게 아니라 나도 기뻐할 줄 알까? 기쁘게 슬픔을 주고 슬프게 기쁨을 줄 수 있을까? 그래봤자 서로 몸이 바뀔 뿐 성격은 그대로이다. 그러니 수동적 태도가 아니라 그냥 생겨 먹은 대로 살뿐이다. 나도 사람 곁에 가긴 싫다. 혹자는 슬픔을 던져주는 것을 무슨 즐거움으로 아는 것 아니냐는 비난을 쏟아내지만, 아시다시피 결코 그렇지 않다. 나는 내가 없어진다고 해도 기쁨이만 사람들곁에 남았으면 좋겠다. 그러면 싫든 좋든 기쁨이는 슬퍼질까? 이럴 때는 기쁨이도 슬퍼질 것 같다. 거기에 나는 기뻐질 것 같고. 결국 우리는 어느 한쪽이 없어질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 부대끼며 살자. 사람들은 내가 나타나면 언젠가는 기쁨이 올 것이란 희망을 기대하지 않는가. 그러니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 주고 다시 살 힘을 주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대로 있을 것이다. 내가 물러나는 자리는 언제나 밝은 빛을 들일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