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있다는 것은 나에 대해 인정받는 것이다. 그 인정은 타인으로부터 나온다. '나'라는 의미는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니 타인을 전제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자신이 고립적으로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처럼 마주 선 타인을 전제하지 않고도 인정이 이루어지는 것일까? 내 속에도 타자가 존재하는 걸 전제해야 할까? 존재로서 '있다' '없다'는 무엇과 비교할 필요도 없이 그 자체로서 그러하다. 그래서 자기 인정은 존재의 확인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상상하기 힘들다. 우리가 모르고 있던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지칭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있었던 것으로 말하기는 힘들다. 발견이나 발명이라 하는 것들도 사실은 부인되던 것이 승인되는 것도, 없던 것이 불거져 나온 것도 아니다. 다만 관계 속에서 의미로 편입되는 것이다. 그래서 단독으로는 인정이란 걸 상상하기 곤란하다. 그래서 자기 인정은 스스로 독백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결국 타자성을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내면의 타자가 나를 부정하는 상황이 되면 내가 무너져 내리는가? 나는 없다고 해야 하는가? 우선 마주 서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나는 있다. 그런 생각을 하면 타자에 의해 나를 확인하는 것보다는 내가 선행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관계 속에서 나를 세운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은 이런 모습일 것이다. 안팎의 타자가 나를 부정하면 나는 없다. 하지만물질로서의 나는 있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사물 덩어리로 주저앉는 것 같다. 사실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말라든지, 남의 말에 따라 사는 타자의 삶을 중단하라는 것 아닌가? 그런데 타인의 시선을 끊어내고 오로지 자신으로만 살고자 하는 몸짓이 무의미해진다. 이것은 오롯한 자기 회귀라기보다는 연결이 끊기는 것이다. 그 족쇄 같은 관계가 해체되는 것이다. 의미가 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니 그것이 해체되면 무의미한 건 당연하다. 여기서 자기를 찾으라는 것은 의미를 끊고 무의미해지라는, 마치 자기 상실처럼 생각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의미가 없어져 죽음으로 이르는 그런 공허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의미 사슬을 끊고 의의를 추구하라는 것이다. 아무 연쇄고리가 없어도 스스로 존재하는 것! 그래서 자존감은 자기 존중이라든지,, 타인에 대한 나의 고유성, 나를 굴욕적으로 느끼지 않는 감정 등을 말하기보다는, 무수한 상징체계에 구속되지 않고도 스스로 존재하는 것을 말할 것이다. 물론 현실의 뉘앙스는 타인에 대해 상대적으로 자신을 수치스럽게 느끼지 않는 감정 상태가 더 가깝다. 자신을 존중하고 가치 있는 존재라고 인식하는 마음이 그것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상대적인 의미이므로 굳건한 바탕을 제공하지는 못한다. 내가 있다는 것은 결국 남의 인정을 전제하지만, 그것에 기대지 않게 나를 인식하는 것이 자존감 아닐까? 그것은 타자를 나처럼 생각하라는 말을 아무리 외쳐도 끝내 실현하기 힘든 것을 나와 내면의 타자기 일치하는 유일한 경험으로 느끼는 경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