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나 의욕은 무언가를 이루어 충족감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 부족하다는 것은 아마도 물질적인 것보다는 심리적인 것이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심지어는 지시하는 무언가를 실제 손에 쥐지 못해도 상실감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거꾸로 무언가의 소유를 확보해도 마음속은 여전히 허전하다고 한다. 몰질적으로는 가지지 못해도 다 얻은 것 같고 또 외형적으로는 다 가져도 빈 마음이라는 이 모순된 순간. 그렇게 보면 상실은 충족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성취의 내용이 드러나지 않는 여지를 갖고 있고 무엇인가를 획득한다는 것이 부분 달성에 불과할 때는 상실감을, 아니 불충족의 사태를 남긴다. 그런데 충족은 욕망의 도달 불가능성처럼 완성, 완료에 있지 않다. 항상 무엇인 가가 결핍한 것이다. 어제 최신형 휴대폰을 구입했음에도 오늘 새로운 사양을 탑재한 것이 나타나면 결핍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익히 생각하는 것처럼, 상실은 충족의 뒷모습이 아니라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 빈 공간을 함께 지시하는 것이 실재, 본질 등을 전제하는 한 영원히 메꿔지지는 않고 동시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실은 적정한 수준에서의 드러난 만족으로 표시한다. 우리는 실재를 상상하는 한 그것을 만날 수는 없다. 이미 상상한다는 것 자체가 상상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충족감을 느끼라고 하는 것은 상상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다. 하지만 상상은 과잉되고 실재는 과소로 나타난다. 이제 상실감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규정할 수 없는 빈 공간을 상상으로 메꾸니 기실 잃어버리는 것은 없다. 문제는 상실했다고 하는 것의 혼란스러움이다. 삶이라고 하면, 본래적 삶을 살지 못하고 타인에 얹혀사는 것일 게다. 그런데 비본래적 삶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신의 의지와 사유의 자유, 타인에 의해 욱여넣어지지 않은 삶 등을 말한다. 그게 현실에서는 무엇을 지칭하는지 알 수가 없다. 빈 공간을 정의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빈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래서 걷잡을 수 없는 순환 논법이 따른다. 모든 걸 다 뒤집어도 그렇다. 상실감을 극단으로 몰아가는 것은 존재의 소멸이다. 그 해명은 견딜 수 없거나 메꿀 수 없음이다. 상실감을 없애기 위한 상실! 상실과 공존하는 것은 정상적 삶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분열을 일으켜 상실을 분리하는 것이다. 분열된 자아에서는 비로소 상실을 말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상실의 성격이 부정적인 탓에 그것의 변증은 상실이다. 부정성으로서 마주 보는 것이 부정을 지양하는 것이 된다.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은 그런 방면으로 보면 현실을 딛고 긍정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